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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3.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by 세자책봉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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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저, 2011, 김영사, 이영미 옮김
최초 작성일 2022.01.01

2022. 01. 04 나른한 오후 햇살이 들면 스콘과 함께 즐겨요 독서 라이프 - 서산 구움당

보헤미안(Bohemian):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근성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필리스틴(Philistine)에 대조되는 말로 쓰임
작가는 굳이 나누자면 고독한 직업이다. 홀로 서재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앉아 의식을 집중해서 문자를 어떻게 배열할지 분투한다. 그런 작업이 매일매일 계속된다. 작품을 집중해서 쓰다 보면, 하루 종일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날도 꽤 많다. 사교적인 성격인 사람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일 거라 짐작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본질적인 고독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모닥불 앞 이야기꾼'의 말예임을 인식한다. 홀로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면서 이따금 칠흑 같은 밤의 짙은 어둠과 모닥불이 튀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기척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가공의 기척에 격려받으며 계속해서 글을 써나간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소설을 쓴다는 것, 이야기의 선순환 中,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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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이 흘러간 탓일까 어린 시절을 이루던 한 편의 것들은 어느새 무수한 조각들로 파편화되어 온전한 기억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인생 최초 기억의 시작점은 1997년도, 그러니까 다섯 살 즈음이다. 당시의 나는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체구가 작았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도 꽤나 온순해서 부모님을 속 썩일만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특히 어른들 말을 잘 따랐던 것 '같다'. 오래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생김새와 달리 성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영역이라 '같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는 점에 양해를. 여하튼, 내일의 것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신기했던 순수한 아이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당연하듯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일찍이도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미숙아로 태어나 더욱 작았던 체구는 어느새 평균 이상을 웃돌게 되었고, 새하얗던 피부는 시간의 때가 묻어 거뭇거뭇해져 버렸으며, 무구한 채색의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던 주변 환경은 반듯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인공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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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변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변함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의 성격이나 외모가 예전에 비할바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중 더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랄까, 무언가 어린 시절의 것을 잃어버렸음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 잦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순수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면서도 직감이라는 표현처럼 그런 느낌이 들게 되는 순간은 순전히 의도적이지 않게 찾아왔다. 홀로 남게 되면 가끔 덮쳐오는 허무함과는 또 다른 형태로 머릿속을 헤짚었다. 옆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문득, 즐겨 찾는 술집의 사장님께 눈인사를 하다가도 문득, 항상 도와주시는 거래처 사장님과 전화를 끝내고 문득.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 그다지 영향을 주는 정도는 아니지만, 한때는 존재했던 순수함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문득, 삶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왔다. 문득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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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비록 물아의 경지에 이른 자가 본인 스스로는 물아의 경지에 이르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고요히 나를 이룸에도 그것의 존재를 미처 인식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순수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리움이나 회상에 기인해 작금과의 시간적인 개념을 구분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 어떤 시간적 괴리나 순수함의 허와 실과 관계없이 '그때 그 시절'로 회귀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차마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것은 그때 그 시절에 듣던 노래를 아직까지도 듣고 있는 '서른 살의 나'가 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15년 넘게 이용하고 있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의 플레이 리스트엔 아직도 아이리버 미키마우스 MP3를 목에 걸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나'와 인터넷 강의를 핑계로 구매한 코원 PMP에 각종 예능과 영화를 주워 담던 '열여덟 살의 나'가 있다. 그렇게 그 시절 노래의 멜로디에 포함된 당시의 주변 환경, 당시의 냄새, 당시의 순간, 당시의 감정 따위가 존재함에 느끼는 지나온 시절에 대한 울림은 분명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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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내게 글쓰기는 오래전 추억이 깃든 노래를 듣는 것과 같다.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의 장면을 되짚어 보게 되는 것처럼 글을 쓰다 보면 한 글자에 나를 뒤돌아 보게 되고, 한 문장에 나를 반성하게 되고, 한 문단에 나를 후회하게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잠시 '그때 그 시절'로 회귀한다. 글을 쓰는 순간보다 과거의 세상에서 발견한 세계의 질서를 다시 한번 곱씹어 지금 글로써 풀어내야 한다. 계곡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에 주차장의 검은색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민주주의의 소수결을 외치던 여섯 살로 돌아간다. 열아홉 살, 수능시험에서 왜 점수를 잘 받아야 하는지 당위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심지어는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그때 그 시절에 관련된 꿈을 꾸기도 한다. 글을 씀에 이런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과거의 나를 마주한다. 그렇게 글에는 점점 부서지는 기억과 옅어지는 감정들이 뒤섞인 나의 인생이 담기게 되고,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순수인지 뭔지 하는 야릇한 감정의 여운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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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듣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이 즐겁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회상하게 해주는 스위치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백만 원 가까이 되는 뱅 앤 올룹슨 스피커를 구매한 것이나 글을 쓰기 위해 투자한 시간들이 내게는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이러한 행위를 치른 후 느껴지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계좌에 일곱 자리 숫자가 한 번에 없어지는 장면을 보는 것도- 회한이랄까, 당분간은 순수라고 퉁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없음을 느끼는 순간이 잦아졌을 뿐이다. 단지 경계스러운 것은 그 당시 최선이라고 믿었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뒤늦게 바라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결과론적으로 완벽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던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감추기 위해, 부정하기 위해 그저 순수를 앞세우는 것은 아닐까. 그저 이름 모를 세상의 이치에 민망함을 달래려 그곳을 '순수한 시절'로 포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연 있는 노래를 듣고 글을 쓰는 것이 단순히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새롭고 신기한 즐거움을 찾기 어려워지는 세월의 무심함을 이겨내려는 반사작용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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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관찰자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작품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이다. 비록 재즈와 클래식을 즐겨 들으며 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와 달리 어떤 장르의 역사나 지식은 관계없이 장르불문 K-POP과 올드팝을 주로 듣는 나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두 인물 모두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그가 '잡문집'에서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만큼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와 이해를 써놓은 글을 보고 있자니 내게는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한 것 같아 괜스레 민망해질 따름이다. 또한 스물아홉 살이 되어 재즈바를 운영하다 난데없이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하루키처럼,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스물여덟에서 아홉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주체적인 사업을 하던 그였지만, 나는 서른이 된 아직까지도 직장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시기적인 우연함과 더불어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보면 '아직 직장인이지만 나도 할 수 있다!'와 같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음에 그의 글들은 내게 활자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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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관된 주제로 쓴 글이 아닌 말 그대로 여기저기 써놓은 잡다한 글을 모아놓은 '잡문집'을 읽고 무언가 결론을 짓고 글을 써야 하는 일은,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도저히 어떠한 관통되는 맥락을 집기가 어려워 글을 쓰고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인스타그램에는 스키를 타러 갔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결국엔 소재를 찾지 못해 내가 글을 쓰는 사고의 흐름이랄까 그 일련의 과정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고, 그 끝에 점점 관찰자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를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는 개인적인 고집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파헤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집중했고, 드는 의구심을 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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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엔 아래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관찰자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순간이 잦아졌지만, 이는 글을 쓰는 일생동안엔 언제든지 예고 없이 찾아올 것임을 직감한다. 한편, 관찰자의 노릇을 하는 시간마저 그 이후의 나에게 관찰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한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 또한 직감한다. 지나친 감정 소비는 뒤로하고 절제된 감정으로 관찰자가 되어 나의 책을 펼치게 되는 순간까지 하루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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