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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0.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테드 창(Ted Chiang)

by 세자책봉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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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Ted Chiang) 저,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2016
최초 작성일 2021.11.11

2021. 11. 11. 제 생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SF(Science Fiction): 사이언스 픽션, 약칭 SF는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담은 문학 장르인 과학소설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나아가서는 그런 요소를 가진 다른 매체들의 장르를 의미하는 단어. 공상과학 아님 주의.
아름다움 또한 광고주들 덕택에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잘생긴 외모에 반응하는 신경 회로를 부여했고, 시각 피질의 쾌락 수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것은 자연환경에서는 유용한 자질이었지요. 그렇지만 백만 명에 한 명밖에는 없는 피부와 골상을 가진 사람에게 전문적인 메이크업과 수정을 가한다면, 여러분이 보게 되는 것은 더 이상 천연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제된 약제급의 아름다움이고, 미모의 코카인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초자극'이라고 부릅니다. (중략). 우리의 미적 수용기는 진화로 얻은 처리 용량을 초과하는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단 하루에 우리 조상들이 일생 동안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름다움은 우리의 삶을 천천히 파괴하고 있습니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8.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中,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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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일 월드컵이 이제 막 지나던 시절, 나보다 다섯 번의 해를 더 보낸 나의 큰누이는 한 달에 한두 번쯤 중학교 앞에 있는 비디오방에 들러 영화 한 편을 빌려오곤 했다. 그나마도 KBS1, KBS2, EBS, SBS 4개의 채널밖에 볼 수 없는 시골집의 텔레비전은 어느덧 중학생이 된 큰누이의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을뿐더러, 아빠는 13년도 SNL에 출현했던 윤제문 배우가 보여준 것처럼 집을 비우는 시간을 제외하곤 한시도 리모컨을 놓지 않고 '아빠 아직 안 잔다'를 시전 하기 일쑤였기에 저녁 6시 이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원하는 채널의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는 것은 네모진 투명 상자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안에 있는 커다란 금괴를 빼가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큰누이는 청소년 드라마나 무모한 도전 같이 -MBC는 나오지도 않았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같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비디오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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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빠의 간섭 없이 유일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할아버지의 방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큰누이는 평소 '엄근진'에서 '엄'을 제외하고 '근진' 하셨던 할아버지에게 혼자 비디오를 봐도 되겠냐고 허락받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탓인지 비디오를 빌려오는 날엔 항상 나에게 같이 보자고 권했는데, 나 또한 저녁이면 사람이 지나다니는 소리보다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시골 바닥에서 책 읽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할 게 없었기에 누나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서로 같은 처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나와 큰누이는 토요일이 되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이 늦기 전 9시쯤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고 빌려온 비디오를 시청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 시절 구름이 가라앉은 어스름한 밤, 시골의 지형적 한계를 벗어나 세계의 문화를 향유하는 배에 올라탄 동료가 된 우리가 -어쩌면 할아버지도 포함시켜야 될지 모른다- 처음으로 본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맨 인 블랙 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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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윌 스미스가 은퇴와 동시에 기억을 잃어버린 직장 동료를 외계인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시키는 내용으로 진행되는 영화 '맨 인 블랙 2'에는 외계인, 외계 괴물, 기억을 지우는 장치, 말하는 개, 머리통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신기하게 생긴 총 같은 것들이 나온다. 지금이야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이 모든 게 자극적이었고 새로웠다. 한 명 한 명의 등장인물들이 새로웠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내용은 내가 있는 현실의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일 같았고, 간단한 버튼 하나로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일은 실제로 가능한 기술인 것 같았다. 신세계였다.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윌 스미스가 우체국에서 일반인으로 위장한 외계인과 비트박스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풉-싸가-픞풉-싸가포카-픕싸가-. 우와. 이런 리듬은 귀뚜라미에게서 들려오던 것이 아니었다. 재미있고 신기해서 몇 번을 되돌려 봤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듣는 라디오에서도, 아빠가 보는 텔레비전의 채널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소리였다. 논과 산, 하늘에 둘러싸여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지내던 순수한 초등학교 3학년 아이와 이런 식으로 낯선 이야기의 첫 만남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SF 장르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뒤에 보이는 전 직장동료와 같이 근무하고 있던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비트박스를 하는 윌 스미스

지금 봐도 이 장면 하나만큼은 정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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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이 강렬했던 만남 이후 지금까지 SF 장르를 좋아하는지 모른 채 꽤나 많은 SF 작품들을 즐겨왔다. 갓무위키에 나오는 SF 영화 리스트만 봐도 20편이 넘는 영화를 봤을뿐더러 건담 시리즈를 비롯한 각종 애니메이션은 물론, 국내/국외 구분 없이 많은 양의 소설도 섭렵했다. 아, 여기서 내가 콕 집어 SF 장르를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이 사실을 글을 쓰고 있는 오늘에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보고 싶은 작품을 고를 때 먼저 장르를 확인하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 버릇이 있는데, 순전히 장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지금껏 난 그저 오래전에 본 이런 식으로 낯선 이야기 같이 재미있어 보이는 작품을 선택하고 소화해왔을 뿐이었다. 그저 우연하게 알고 봤더니 내 인생을 차지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SF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제 와서 굳이 내가 지금껏 봤던 SF 작품의 수를 헤아려 보게 되고, 내 취향이 SF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SF소설의 대가로 불리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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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 건 tvN의 교양 프로그램인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를 통해서였다. 왕십리역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간단히 회포를 풀고 들어갔던 모텔 방에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인데, 오지 않는 잠을 부르기엔 책만 한 게 없다는 걸 알기에 자연스레 채널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볼륨을 줄인 채 잠을 청했다. 그런데 쥐 죽은 듯 잠잠히 들려오는 텔레비전 속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김범준 교수님은 오늘 소개해줄 책이 SF소설로 받을 수 있는 상은 모조리 휩쓸었을 만큼 대단한 책이라고 했다. 근데 그 책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응? '마션'이니 '인터스텔라'니 하는 SF 느낌 가득한 제목이 아니고? SF소설인데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고?

 

제목만 봐서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설이나 수필처럼 느껴져 SF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 볼륨을 조금 높였다. 그리고 잠시 후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치밀한 의도라는 것을. 작가는 의도적으로 언발란스한 제목을 매칭 시켜 이 책을 고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누워있던 몸은 어느새 베개를 등받이로 일어나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선 저 책을 무조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볼륨을 더 높였지만 더 이상 김범준 교수님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젠장,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어떤 스테레오 타입도 생겨서는 안 돼!

 

그리고 다음날, 작품상을 탈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겠거니 하는 편견을 한가득 안고 왕십리역 영풍문고에 들러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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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작가인 '테드 창'은 대만계 미국인 태생으로 현존 최고의 SF소설 작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90년 본인의 첫 작품인 '바빌론의 탑'을 발표했는데, 작가로서의 재능이 너무나도 훌륭했던 나머지 첫 작품부터 권위 있는 SF 문학상 중 하나인 네뷸러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영으로 나누면', '이해' 그리고 2019년 '숨'까지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내보이며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리는 등 아직까지도 건재한 SF소설 작가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이비리그의 브라운 대학의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하여 '테크니컬 라이팅'을 본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테크니컬 라이팅'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던 것을 보니, 어쩌면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현재 프리랜서로 소설 작가로서의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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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작가인 '테드 창'이 1990년부터 2002년까지 집필했던 작품들을 한 권에 수록한 첫 번째 단편소설 작품집이다. 책은 '바빌론의 탑', '영으로 나누면', '이해', '네 인생의 이야기', '인류 과학의 진화', '일흔두 글자',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까지 총 8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SF 소설로서의 충분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드 SF 작가로 불리는 '테드 창'이 휘갈기는 과학적 근거 가득한 글들은 가히 압권이었다. 글을 보면서도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분명 SF 소설인데 과연 어디까지 과학적이고 어디까지 유사과학적인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내용이 주는 몰입감도 정말 대단했다. 몰입감이 기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가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려 소설 속 이야기가 마치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인데, 한편으로 이런 작업을 훌륭하게 완수한 작가의 노력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유의 내용들은 특히 논리를 맞추기 어려워 철저한 고증 없이는 함부로 쓰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아마도 작가는 이 정도의 글을 쓰기 위해서 마치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인 사실들을 분석하고 연구했을 것이 분명했고, 내용이 주는 몰입감을 한편으로 작가의 완벽주의적인 태도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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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소설 중 가장 인상 깊게 본건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였다. 이 소설은 얼굴에 대한 미적 판단을 담당하는 신경회로를 차단하는 칼리아그노시아(이하 칼리)라는 기술을 주제로 다큐멘터리처럼 등장인물들이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단편소설이 특별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바로 이 편에서 SF 소설의 장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첫 번째 장점은 SF 소설을 통해 현실적인 미래시 중 하나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장점인 이유는 나처럼 현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재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반도체 회로의 성능이 2년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는 무어의 법칙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요즘은 주식시장에서도 FANG주라는 -지금은 MANG주가 되었지만- 이름이 붙을 정도로 기술주가 대세임은 물론, 분명할 정도로 기술이 중요한 세상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기술 중에는 '뉴럴 링크'에서 연구 중인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이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은 구체적인 콘셉트는 다를지언정 뇌에 무언가를 삽입해 뇌의 기능을 제어하겠다는 맥락에서는 소설 속에 등장한 칼리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나는 분명 소설이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충분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는 주제였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대해 조금 더 현실성 있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 작품 속 이야기가 실제 미래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미래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 적절한 현실성과 상상력이 더해져 이야기에 재미는 물론 강력한 몰입감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미래시 중 하나를 맛볼 수 있다는 장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SF 소설이야말로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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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SF 소설의 장점 두 번째는 민감한 사항에 대한 자연스러운 발의와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감한 사항이라는 것은 대체로 기술 발전에 따른 도덕적, 윤리적, 철학적 관점에 해당되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비록 허구로 드러나긴 했지만 중국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해 인간을 복제하려는 시도를 했었던 것에 대한 전 세계적인 반발이 거셌던 사건이 대표적으로 민감한 사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칼리 사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들로 나름의 논리를 갖추며 민감한 사항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찬성이 어떻고 반대가 어떻고 하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민감한 사항에 대해 재정립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우리는 무분별한 기술발전에 점점 위태로워지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립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술이 가져오는 편리함을 앞세워 이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인간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얘기할만한 자리도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민감한 사항은 반드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사항임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SF 소설은 현실에서 논의하기 어려운 기술발전과 관련된 민감한 사항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이것 또한 분명한 장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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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다섯 번째 수록된 작품의 제목은 '일흔두 글자'로, 물체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어 그 이름을 물체에 넣어주면 물체가 움직이기도 하고 성질이 변하기도 하는 등 신성한 힘을 부여하는 이름을 연구하는 '명명학'이 발달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야기다. 이 세계관에서는 특정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존속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이름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실로 엄청나다. 그렇기에 명명학을 따르는 과학자들은 물체의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다. 그런데 실은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갖고 있는 신성함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특히 길가에 위치한 노점에서 주로 활동하며 이름의 신성함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M·Z세대를 기점으로 이것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주변에서도 이것을 공부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성명학' 쉽게 얘기해서 '이름풀이'다. (다섯 번째 작품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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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사주를 볼 줄도 모르고, 이름풀이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름풀이'가 느닷없이 생각난 것은 '일흔 두 글자' 세계관의 '명명학'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책이 장르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름)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SF 소설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 도대체 SF 소설의 제목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인 이유가 무엇인가? SF 소설 속에 테드 창의 인생 이야기가 녹아있기 때문인가?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의 인생과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이 있는 것인가? 혹시나 싶어 이 책의 네 번째 이야기인 '네 인생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연관성을 지어보려고 해도 연결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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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풀리지 않는 수리 나형의 28번 문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 뻗친 궁금증이 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의도치 않은 고뇌에 빠져나오기를 여러 번,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내가 책 이름을 다시 지어주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명명학'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단편소설이 포함된 단편소설집이니까 '명명학'에 기초해 신성함을 갖고 있을 만한 이 책의 진짜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다. SF 장르, 소설, 과학, 현실성···. 이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제목이 없을까? 문득, 어젯밤 쇼미더머니10에 출연한 조광일의 가시 라이브 무대를 보다 한 제목이 떠올랐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보다 더 진짜 같은 제목. '당신의 인생일 수도 있는 이야기'

 

무언가 어울리지 않던 책의 제목이 '일흔 두 글자' 세계관의 '명명학'에 기초해 바뀌게 되니, 이제야 책의 제목과 SF라는 장르와 그리고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까지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였다. 드디어 진짜 제목을 찾은 듯했다. 진짜 제목을 찾은 책에는 신성함이 가득하게 느껴졌다. '당신의 인생일 수도 있는 이야기' 아오! 속이 다 시원하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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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참조: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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