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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1. '또 하나의 디자인', 나가오카 겐메이(Nagaoka Kenmei)

by 세자책봉 202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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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겐메이(Nagaoka Kenmei) 저, '또 하나의 디자인', 2020
최초 작성일 2021.11.23

2021. 11. 26. 올해가 지나가기 전 반드시 디앤디파트먼트스토어에 가보리라.
업사이클링(Upcycling): 기존에 버려지는 제품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디자인을 가미하는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업사이클링의 우리말 표현은 ‘새활용’. 생활 속에서 버려지거나 쓸모없어진 것을 수선해 재사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의 상위 개념.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물건을 사게 된다.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지 판단하기 전에 누군가가 설정한 '풍요'같은 허상에 속아 물건을 원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당신'이 아니다. 정말 필요한 물건은 대개 한두 개다. 부엌 서랍 속에 젓가락이나 컵이 가득해도 매일 집어 들어 사용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생각해보라. 매일 사용하는 물건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 물건이 당신의 질을 높여 주고 있기에, 물건을 산다는 것은 당신의 질에 관계된 일이다. 당신의 질을 높이지 않는 물건은 필요 없다. 마음에 들지 않아 1년 내내 단 한 번도 건드리지 않는 물건은 당신의 감성을 흐릴 뿐이다. 물건을 철저하게 고르려고 해 본 적이 없으니, 일단 사고, 사들인 물건이 쌓인 서랍 속에서 다시 골라야 하는, 그런 쇼핑은 과감하게 그만두어야 한다. 우선 철저하게 고르고, '이것이다' 하는 물건을 찾아내어, 철저하게 그것만 가지고 살아보자. 아마도 거기에 당신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물건을 계속 사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건은 행복을 깨닫게 해 주지,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또 하나의 디자인' 10. 전하는 방법을 만든다 中,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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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서 출발해 러시아와 북한을 지나 너무나도 오랜 비행에 한껏 성난 듯 -하필 그곳의 지도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도- 서울에 있던 나의 양 볼을 따갑게 만들던 겨울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한 2018년 2월에는 인생의 변곡점이라고 부를만한 일이 있었다. 16년도에 복학한 이래로 줄곧 마음이 맞던 같은 과 동기 두 명과 힘을 모아 준비했던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과기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날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내 가치관을 비롯한 모든 생활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종에 성공 방정식이 생겼다고 할까? 나는 당시 목표와 방향 그리고 노력이라는 3중주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온몸으로 느꼈다. 아주 정확하게 그것도 매우 경험적으로 말이다. 인생에 한 번도 못 받을 수도 있는 거니 후회 없이 해보자는 다짐으로 지난 6개월간 믹서기에 넣고 돌리듯 갈아 마신 영혼을 누군가 '인식' 해줬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발현되는 엄청난 해방감과 성취감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마치 자신의 몸을 태우며 있는 힘껏 하늘로 올라간 폭죽이 사방으로 터지며 빛을 발산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에 느꼈던 무수한 감정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인식'하기 위해, 대회의 참가 사은품으로 받은 가방을 마치 지갑 속 부적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매일 메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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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son이라는 작은 명판이 앞면의 상부 중앙에 마감질 된 회색 가방은 생각보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공대생들이 사용하는 무거운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엄마에게 돈을 빌려 구입했던 두꺼운 게이밍 노트북도 아주 잘 들어가는 정도로 공간 구분도 잘 되어 있었고 정교함이 돋보이는 여러 포인트가 있을 정도로 전혀 사은품스럽지 않았다. 장인의 거친 숨결이 담긴 명품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마감 상태가 좋아 튼튼한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더 이상 수백 가지의 가방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번거로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노트북을 갖고 다닐 적당한 가방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찮게 굴러들어 온 복덩어리에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존재의 의미를 넘어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아주 '쓸모' 있던 회색 가방은 그렇게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약 4년 동안, 불과 일주일 전까지도 나의 등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보다 더 멋진 놈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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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과거의 흔적. 터져가는 실밥과 지저분한 때. 이제 그만 놓아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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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인스타그램 눈팅족으로 활동하다 신묘한 알고리즘에 이끌려 '카네이테이'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피드에 보이는 가방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홈페이지를 구경하려 했지만, 그곳에 적힌 그들의 목표와 추구하는 가치를 알게 되면서 '카네이테이'에 점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카네이테이'는 군에서 사용되던 폐천막을 업사이클링하여 -재활용에 더해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일- 가방을 비롯한 여러 제품들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새로운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 사용된 자원을 활용해 제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행보는 너무나도 인상 깊었고, 그들의 섬세한 마감질로 폐천막에게 부여한 새로운 가치는 굉장히 '쓸모' 있어 보였다. 그들의 제품 하나하나에서 빛이 나오고 있는 듯했다. 특히 피드에서 봤던 가방은 디자인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멋있어 보였다. 안 그래도 점점 제 몸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회색 가방을 이제는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가치투자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주 오랜만에 가치 충만한 멋진 놈을 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벌고 있겠다 이번에야말로 명품 가방을 구매하려던 아쉬움은 남아있었지만, 끓어오르는 가치투자 욕심에 구매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카네이테이'를 알게 되고 그 가치를 이해하게 된 것에는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책 '또 하나의 디자인'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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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책을 읽고 디앤디파트먼트에 대해 몇 번 검색했던 것이 광고 알고리즘에 영향을 주어 '카네이테이'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친구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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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디자인'은 저자인 나가오카 겐메이의 생애를 비롯한 역사, 그리고 그의 디자인 철학이 담겨있는 책이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우리나라의 서울과 제주에 있는 디앤디파트먼트를 만든 인물로 재활용과 디자인을 접목시킨 일본인 디자이너다. 그는 어릴 적 '스스로 해보자'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라 가족과 함께 인형, 야구 글러브, 휴지통 등 다양한 것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디자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1995년부터 재활용품점을 오가며 좋은 디자인을 갖고 있는 물건을 사모으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며 이 남다른 취미는 중고품을 매매하는 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좋은 의미에서 구매했던 중고품 마저 버려지는 모습을 보며 재활용과 디자인을 결합시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업사이클링 브랜드인 디앤디파트먼트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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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겐메이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출석을 잘못 부르는 일로 '유니크'함에 대해 일찍이 깨우쳤으며,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일한 경험으로부터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닌 '의미 있는 아름다움'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훌륭한 디자이너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물건에 담긴 세월의 흔적이 주는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획일화된 공산품이 넘쳐나던 시대를 지나 세월의 흔적마저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다. 더 나아가 물건이 오랫동안 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쉽게 질리는 편이기에 변덕이 발생하기 가장 쉬운 영역인 유행이라는 리스크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디자인을 시작할 때 사무용품처럼 유행이 없는 물건부터 디자인해보길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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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디자인 철학에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바로 주체성과 사업성이다. 그는 온전한 본인의 경험을 중요시한다. 고객이 좋아할 만한 것, 다른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 본인이 만족스러운 것, 본인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타인의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가치를 나의 시선에서는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던 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성질이며, 쇳물을 만들기 위해 쇠를 녹여야 하는 것처럼 작품에 '쓸모'와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야 말로 작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남의 것을 베껴서 만들어진 작품에는 그 '쓸모'와 '의도'마저 남의 것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가치를 녹여내는 것. 그것이 그의 디자인 철학의 첫 번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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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디자인 실력이나 미적 감각을 별개로 뛰어난 사업적 능력도 갖고 있다. 47도도부현의 지역 다움을 소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 안내서를 만들기 위해 각 지역의 개성을 담게 된 이후 발화되는 여러 가지 사업적인 일화에는 섬세함을 넘어 굉장히 전략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 디자인, 마케팅, 사업적인 것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낸다. 새로 입점할 카페의 위치 선정을 위해 유동인구가 많은 곳부터 조사하는 스타벅스처럼,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가치를 만들어 자연스러운 쓰임을 유도한다. 그는 사업적 영역이 디자이너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절대 우연스럽지 않다. 그가 디자인하는 것들에는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인 '쓸모'와 '의도'가 녹아있어 자연스럽게 사업과 연결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적인 잠재력을 담아내는 것. 그의 디자인 철학의 두 번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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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다. - 히루루크(In 원피스)


그는 물건의 가치를 디자인한다. 사람들에게 잊혀질 위기에 처한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준다. 그는 '그가 보기에'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을 수집한다. 그가 선택한 물건의 디자인은 '유니크'하다. 선택된 물건엔 새롭게 프린트를 하건 테이프를 붙이건 이 제품은 재활용품이라고 반드시 명시한다. 물론 이런 명시에도 굉장히 분명하고 '유니크'한 디자인이 사용된다. 필요하면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제 가치를 잃고 존재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던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물건은 곧 재활용품이 되며, 엔트로피를 최소화한 작업으로 만들어낸 친환경 제품이 된다. 오늘날 디앤디파트먼트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가치는 우리에게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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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만들어낸 가치가 더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은 제품의 업사이클링 과정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물론 친환경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그저 과정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그리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일에 태양광 패널의 효율을 높이는 것만큼 중요한 기술이 필요할까? 이들이 하는 일에 질소산화물(NOx)과 황산화물(SOx)을 완전히 잡아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까? 이들이 하는 일에 이산화탄소(CO2)를 포집하는 기술이 필요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의미 있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실생활에 먼 곳에 있는 행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환경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구나 집 안에 모아둔 종이가방을 재활용에 흔쾌히 참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한다. 그리고 필요한 이들에게 재활용이라는 떳떳한 가치를 부여한 종이가방을 전달한다. 재활용이라는 가치를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이로써 재활용의 가치를 얻은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친환경적인 행보에 동참하게 된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한 번 주어진 가치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몸소 친환경을 경험하게 해주는 그들의 가치는 더욱 의미 있다. 친환경 기술이란 답시고 오히려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여 신제품을 만들고,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랑스럽게 친환경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들보다는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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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은 중요하고, 누군가 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진정한 친환경을 추구하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므로, 이런 현실성 없는 논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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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70년 넘게 살아보니께, 남한테 장단 맞추지 말어. 북 치고 장구 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 박막례(유튜버)


'또 하나의 디자인'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는 친환경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나가오카 겐메이가 보여주는 주체성에 더 관심이 갔다. 그리고 문득 박막례 할머니가 던진 명언이 떠올랐다.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시키는 것. 자신의 길을 가는 것. 나가오카 겐메이와 할머니는 서로 뱡향이 다를지언정 그들이 추구하는 길에는 온전한 자신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듯 보였다. 그들은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디자이너로써 고객을, 유튜버로써 시청자들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길을 간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남들은 나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는 것을. 터져 나오는 뒷얘기들은 그저 가십거리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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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나의 길을 가자.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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