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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2.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by 세자책봉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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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저,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2021, 열린책들
최초 작성일 2021.12.03

2021. 12. 03 어두워지는 하늘의 구름 색이 아름다워, 책보단 구름에게 포커스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포스트모더니즘 후의 후기 근대성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의 고체(Solid)적인 근대성이 액체(Liquid)와 같이 되었다는 불확실한 후기 근대성을 표현하며, 후기 근대성을 설명하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처음 사용했다. 즉, 예전엔 고체(Solid) 같았던 사회가 액체화 되면서 사람들이 불확실성이 가득한 사회에 빠지게 되었다는 건데, 이 액체 근대는 결속 끊기, 회피, 손쉬운 도주, 절망에 찬 추격의 시대, 즉 개인이 매우 유동적인 삶에 처하게 되는 사회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용감하고 신중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요즘엔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로 정신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적 인물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게 금메달을 나눠 주기에 급급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가 뭔지 몰라 일일이 지시 내려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나라는 불행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 그것이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의 이념이었다.
-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3부 음모와 대중매체,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 中,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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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기를 몇 주 앞둔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큰 꿈을 안고 간부가 되기 위한 진급시험을 치른 이들에 대한 격려와 환호소리가 울려 퍼진다. 만 4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직원들에게는 간부의 첫걸음 격인 차장 진급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는데,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는 합격하기 쉬운 시험은 아니기에 이들이 느끼는 기쁨은 입사시험에 최종 합격의 순간에 못지않을 성싶다. 한편으론 직원인 내가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해가 불과 몇 주 뒤 다가오기에 이들의 성취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회사의 차장 진급시험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어느 순간에서부터 차장 진급시험에서 누군가 떨어졌다는 비보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군가 떨어진 것에 대해 눈치껏 대놓고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탈락자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시험과 마찬가지로 이 시험에도 분명 커트라인이 존재하고, 충분히 탈락자가 발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터링 장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에서 충원하고자 하는 차장의 수보다 차장 진급시험 응시자의 수가 더 적기 때문인 탓이다. 다시 말해 직원들이 간부로 진급을 하려고 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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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 등장>

20세기 중반, 1·2차 세계대전으로 대표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온 서구 문명에서는 전체 혹은 집단이라는 명목 하에 개인이 희생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주의가 부상했다. 같은 시각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를 울부짖으며 한민족의 이름으로 규합했고, 1945년 독립과 1950년 6.25 전쟁을 치른 후엔 무너진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경제성장을 목표로 단합했으며, 독재자들로부터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단결했다. 이렇듯 개인주의가 부상하던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수 차례의 국가적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엔 집단의 역할이 컸던 것은 사실이고, 이로 말미암아 국민들에게는 이러한 성취가 집단적인 행동으로서 얻어낸 무궁한 결과물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단합력은 1997년에 국가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너나 할 거 없이 자신의 집에 있는 금을 국가에 가져다 줄 정도로 국민들 마음속에 각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중심 문화에는 경험적으로 집단주의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 문명보다는 한발 늦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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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 대한 반감, 개인주의 등장>

결국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빠른 시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안정되었고 교육 수준은 높아졌으며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경제와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잘 나가던 집단주의에 크랙(Crack)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구 문명과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성취를 얻는 동안 개인들은 어떻게 무너지고 지워졌는가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국가유공자 특히, 6.25 전쟁 참전용사들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빈약한 처우에 대한 내용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지 않는 국가의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국가라는 집단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상에 대한 상한선이 어디까지 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최소한의 대우는 해줘야 마땅한 이들에 대해 국가는 아직까지도 마땅한 해답을 내놓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집단주의에 대한 반감에 휘발유를 들이 붙는 격이 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친일파 청산 관련 문제다. 국가유공자들의 처우에 반해 친일파들에 대한 처분이야 말로 독일의 나치 청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라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야 할 마당에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또는 않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어찌 보면 국민들은 집단주의의 말로를 미리 본 셈이다. 그런 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호위 호식하는 이런 상황에, 분노하는 한편 누구라도 몸 써가며 국가를 위해 희생할 바에야 친일이나 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게 개인에게는 더 이득이다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 집단주의가 옅어지고 개인주의가 짙어지게 된 것에는 내부적으로 개인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고, 서구 문명에서 보기엔 이미 예견된 수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국가를 상대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집단에게도 같은 맥락의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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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와 회사>

국가로부터 촉발된 집단주의의 개인에 대한 참상에 대해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어 자신의 최측근에 있는 집단을 향해서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애석하게도 그 시선은 본인이 몸담고 있는 회사로 향했다. 각종 매체에서 본격적으로 회사라는 집단 아래 버려진 이들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한 직장에서 뼈를 깎은 이들의 결로는 대부분 그나마도 정년을 채우지 못한 채 원치 않는 퇴직을 하기 바빴으며, 사회로 내던져졌을 땐 회사일에 지나치게 집중했던 나머지 회사일을 제외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치킨집뿐이었고, 제 아무리 애사심이 강하고 능력이 출중한 직장인도 사내정치에 휘말려 고꾸라지기는 부지기수였다. 또한 오로지 회사에 집중했던 직장인보다 회사일은 적당히 하고 다른 쪽에 -이를테면 주식, 부동산 등- 시간을 할애했던 중간 포지션의 직장인들이 훨씬 더 많은 자본주의적 이점을 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회사라는 집단에도 개인주의가 스며들게 되었다. 직장인들에게 회사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보다는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며 개인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더 이득이다 라는 의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직장인들은 사내에서 필요한 역량보다 사회에서 필요한 역량을 기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개인 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또한 오로지 회사일에 공들이기보다 주어진 시간만큼만 회사에 할애하고, 남은 시간은 철저히 개인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봉급의 차이보다 개인으로써 사회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 구조가 많아진 탓이었다. 결국 회사에 침투한 개인주의에 대한 열망이 결국 오늘날 직장인들이 진급을 하지 않으려는 기조에 단초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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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와 회사>

한편 국가를 향한 집단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MZ세대에게 개인주의의 대상은 특히 회사가 되었다. 그나마도 이들에게 남은 집단이라고는 종교, 군대, 회사인데 종교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해결되고 군대는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해결되기에 주요 대상은 회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이미 개인주의를 생활습관으로 받아들인 세대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급변하던 -아직도 진행 중인- 사회적인 분위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거니와, 어려서부터 또래들과 경쟁을 해야 하다 보니 단체로 행동하는 것에 시간을 쏟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하다. 그렇기에 MZ세대는 나에 대한 인식, 자아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즉 본인의 자아가 온전하게 지켜지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구속되려 하지 않고, 자아가 지켜지는 곳에 구속되더라도 그 강도는 현저히 낮게 유지하길 원한다. 물론 본인의 자아와 맞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렵게 입사한 회사임에도 본인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꽤 드물다는 것이다. 회사에 입사한 것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다. 이들에게 회사는 그저 '시드머니를 만드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굳이 간부가 되어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간부가 되어봐야 업무강도와 업무적 책임감만 늘어날 뿐 어차피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연봉은 세금을 제 하고 나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경로로부터 흘러나오는 정보들 덕에 간부가 되면 워라밸을 망쳐가며 -정작 글쓴이 본인은 워라밸을 추구하면서도 워라밸이 없어지는 삶의 경지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휴일을 가리지 않고 제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하며 직장상사에게 의전을 하는 것은 물론 각종 로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마치 국가를 바라보던 집단주의의 말로를 내다본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회사의 간부가 된다는 것은 사회로의 탈출구를 닫는 것과 같고, 곧 진정한 회사의 노예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것과 별 다를 바 없게 되었다. (한편 이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엔 부모들의 영향도 있거늘 정작 부모님 세대인 회사의 간부들이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은 본인들의 자식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음에 참담함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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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의 문제점>

그런데 이미 우리 사회를 장악한 개인주의의 이면에는 조금은 독특한 문제가 있다.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너무나도 존중한 나머지 선택지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 채 '선택 장애'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들은 세계의 무한한 선택지에서 반드시 자신만의 것을 찾아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다. 선택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선택지에 대한 불확신을 해소시켜주지 못했음에도 선택지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개인들을 그저 관심 밖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결국 개인주의의 파도에 어중간하게 휩쓸려버린 개인들은 망망대해의 한 복판에서 나침반을 잃은 배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표류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특히 현명한 개인들은 더더욱 확신을 얻지 못한 채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점심식사 메뉴를 고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선택의 문제에서 조차 말이다. MZ세대가 간부가 되려 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흘러가고 있는 것이고, 세상의 무한한 선택지 사이를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확신이 없는 선택지뿐인데, 선택을 하라 하니 진급을 하기에도 하지 않기에도 애매한 중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선택 장애'는 비단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으로도 주의 깊게 봐야 할 문제다. 개인주의가 부상하면서 망가진 이념체계에 대해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의 규합 없인 존재할 수 없는데, 개인들이 선택할만한 적당한 이념이 없다는 것은 국가의 존재에 대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과연 국가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개인들을 묶을 만한 패러다임이 존재하긴 할까? 민주주의 다음으로는 사회주의가 온다는 이론처럼 우리는 점점 사회주의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동 사회(액체 근대)라는 단어를 책으로 알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위키백과를 둘러보기 전엔 전혀 몰랐음에도 단어의 뜻풀이가 낯설지 않은 것은 내가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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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대로 이 세상은 미쳤을까? 글쎄, 완전히 미쳤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미쳐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너무나도 다양한 의견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영향력 있는 소수만이 의견을 널리 알릴 수 있던 과거와 달리, 너나 할 거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시대적인 영향이 크다. 나 또한 인터넷의 힘을 빌려 나의 의견을 게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겠느냐만 어쨌든 나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알베르 카뮈가 얘기하는 '이방인'의 자세로 세상을 들여다볼 뿐이다.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다. 책에는 이탈리아어로 출판된 이 책의 원 제목이 「파페 사탄 알레페: 유동 사회의 연대기」라고 한다. 응?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봤다.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응? 제목의 상태가? 두둥 탁.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XX - 영화 '공공의 적' 中 이원태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자극적인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단순히 마케팅을 잘했다고 봐야 하는 건지. 다시 한번 책을 펼쳐보지만, 역시 작가는 세상을 미쳤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럽다. 미친 세상이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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