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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27. '왜 살아야 하는가(The Meaning of Life and Death)', 미하엘 하우스켈러(Michael Hauskeller)

by 세자책봉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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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하우스켈러(Michael Hauskeller) 저, '왜 살아야 하는가(The Meaning of Life and Death)', 2021
최초 작성일 2021.10.17

2021. 10. 17. 모든것이 무의미하게 보였던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났던 책, 어려운 책

不讲问题 不成问题(부강문제 부성문제):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정글만리, 조태오(베테랑), 출처
제임스는 "삶에서 기본적으로 확정돼 있는 좋은 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보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자는 것, 몸을 과감히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익에 지나치게 무감각한 경향이 있다. 삶을 좋게 만드는 것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대개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 단계, 순전히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단계로 끌어내릴 때 삶이 제공하는 강렬한 즐거움" 덕분이다. 의미가 자연적으로 그리고 제일 먼저 생겨나는 곳은 바로 감각이다. (중략) 우리는 그저 세상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즐기면 된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투지를 내려놓은 채 긴장을 풀고 삶을 한껏 받아들이면 된다.
- '왜 살아야 하는가' 7장 구체적인 세계의 극적 풍성함 中 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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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알람이 울린다. 이 세계의 수많은 표상 중 하나인 내 몸뚱아리도 어느새 적응이 된 듯 기상 알람이 싫지만은 않다. 그리곤 간단한 체조와 함께 잠을 떨어뜨리고자 한다. 하지만 쉽진 않다. 몸의 관성이 이미 자는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잠을 떨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씻는 것이다. 간밤에 적응된 주변 온도와는 다른 물의 온도가 피부에 닿는 순간 온몸엔 짜릿한 전기가 흐르고 이내 기울었던 몸의 관성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 씻은 후의 몸은 미약한 한기와 상쾌함을 동시에 느낀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후엔 반드시 몸의 수분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간단한 스킨로션을 발라줘야 한다. 그리고는 오늘 입을 옷을 고른다. 머릿속으로 이내 몇 벌의 조합이 완성되고 옷을 입는다. 매번 그렇지만 오늘도 간단한 슬랙스에 깔끔한 셔츠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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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삑. 어제저녁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생의 문제로 어지러운 머리를 달래고 싶어 하던 주인 놈의 성질머리 없는 드라이빙 덕에 한껏 달아오른 심장을 식히고 있던 차를 깨운다. 오래된 연식 탓에 가끔 힘든 티를 팍팍 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큰 무리 없이 제 몫을 다 해주고 있는 차의 거친 숨소리는 주인 놈에게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한편으로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동시에 발현시킨다. 다행히 아직은 차를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발현된 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자리로 스며들어 형체가 있는 듯 없는듯해진다. 보통 출근은 제 시간보다 30~50분 먼저 도착할 수 있을 시간에 한다. 대시보드의 디지털시계가 0650이라는 숫자를 내보인다. 출근길은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지만 가는 동안 지난밤의 세계 경제상황을 공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익숙해진 손동작으로 한국경제 채널을 튼다. 주된 관심사는 미국 연준의 행보다. 연준이 금리를 어떻게 조정하려나? 테이퍼링을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하려나? 오늘의 뉴스에서도 이들의 행보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 개미는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건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을 보니 이것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머리가 또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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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40분, 출근 후엔 오늘의 업무를 먼저 정리하고 하나하나씩 진행시킨다. 탁타탁... 주요한 업무는 오전에 끝내야 한다. 오직 오전에만 느낄 수 있는, 세상을 깨우는 아침의 기운은 어젯밤 인생의 문제와 오늘 아침 경제 문제로 어지러웠던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주어 온전히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회의... 타탁탁... 회의... 탁탁타... 그렇게 몇 번의 회의를 하고, 남은 시간에 업무용 PC의 키보드 자판을 연주하다 보면 어려울 것만 같던 일도 술술 진행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동료들이 주위로 모여들고 있다. 밥 먹으러 가자는 동료의 말에 11시 30분이 되었음을 직감한다.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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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주로 혼자 먹는다. 동료들과 어울리는 건 좋지만, 오며 가며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워 간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편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그런데 요즘엔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뱅앤올룹슨의 헤드폰을 쓰고는 노유림의 기약 없는 이별을 틀어놓은 채 세상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어젯밤, 아니 벌써 한 달 전부터 늦은 밤 노크도 없이 찾아온 공허함이 오늘 밤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그것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도 언제부터 움직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흔들리기만 하는 커다란 궤종 시계의 진자처럼 공허에 매달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할 것이 분명하다. 시간이 없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찾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 왜 살고 있는지.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이 세계에 눈뜨게 했는지. 내가 이토록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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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 답이 없어 보이는 고뇌에 어떤 생각조차 못하는 것인지 이에 지쳐 잠이든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릿속엔 도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하얗고 내 눈앞엔 그저 졸고 있는 업무용 PC가 있을 뿐이다. 딸깍.

짧기만 했던 점심시간의 고뇌를 깨우는 소리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곳임에도 전기를 아껴 써야 한다는 내부 방침에 따라 점심시간에는 잠시 전기를 형광등에서 쫓겨내는 탓이다. 어느새 때가 되어 누군가 다시 전기를 형광등으로 불러온다. 인생에 취해 잠을 자던 동료들도 하나 둘 일어나 앉는다. 시간이 부족했던 탓일까? 오늘도 역시나 매일 밤의 손님이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진 못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이곳은 회사다. 최대한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내 켜진 형광등처럼 마음의 스위치가 빠르게 바뀐다. 아쉬움을 뒤로 오후 업무가 시작된다. 졸고 있던 업무용 PC의 화면 구석엔 01:00이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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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업무는 영 효율이 좋지 못하다. 오전에 중요한 일들을 대부분 처리했기도 하거니와 퇴근까지 절반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무언의 해방감으로 인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업무 속도가 마치 금요일 오후 꽉 막힌 서해안 고속도로의 상행선을 달리는 것만 같지만, 결국엔 서울에 도착하고 말듯 일이 하나씩 정리된다. 오후 3시, 이제는 속도를 더욱 줄여달라고 떼를 쓰는 탓에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직 안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조금은 지친 몸을 이끌고 휴게실로 가 몸에 카페인을 공급한다. 벌컥벌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급하게 마신 탓에 잠시나마 아까의 고뇌마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느낌이다. 다시 못다 한 업무를 진행한다. 지금은 퇴근까지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퇴근을 할 수 있다니! 새로운 활력이 몸속에 깃드는 것을 느낀다. 퇴근하는 나의 모습이 상상되어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띤다. 하지만 퇴근을 계속해서 의식할수록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퇴근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마음은 못 속이는 법. 손가락이 자꾸만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 눈이 자꾸만 업무용 PC 화면 구석을 보고 있다. 4시 1분. 4시 2분. 4시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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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업무용 PC가 꺼진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야근을 하지 않도록 사내 시스템으로 통제하고 있는 덕이다. 오후 6시에 강제로 종료되는 PC 앞에선 어지간히 급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야근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퇴근을 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동료들, 상사들의 퇴근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직장인들은 퇴근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다들 이리도 기분이 좋을까. 너도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퇴근길의 차량 행렬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린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큰 불만을 표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언제나 퇴근은 즐거움을 주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이제 나는 꽉 막힌 차량 행렬을 뚫고 나와 조금은 여유로운 길로 들어선다. 나는 회사와 완전히 분리된다. 거의 유일하게 사회에서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회사와 분리됨과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하나의 피조물이 된다.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누군가가 아닌, 세계에 의지로 표상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지금이 몇 시더라? 7시?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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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계약이 몇 달 남지 않은 오피스텔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동료들이 선물해 준 금전수를 제외하곤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냉장고의 팬이 잔잔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간단하게 집안 정리를 하고는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엔 별 다른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해결한다. 깨끗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샤워를 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식곤증이 몰려오기 전 곧 완전히 깨어날 고독한 존재를 있는 힘껏 받아들이기 위해 온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샤워 후엔 물방울과의 마찰로 이내 정신이 맑아진다. 평소의 맑은 정신은 긍정적인 기운을 주지만 근 한 달간은 어째 다른 느낌이다. 맑은 정신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에도 여지없이 찾아올 공허함에 조금은 짜증 나고 두렵기만 하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맑은 느낌이다. '무'의 상태라서 공허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자꾸만 공허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도저히 이 고독한 존재는 지금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삶이 공허하다. 삶엔 아무것도 없다. 삶은 고독하다. 어느새 방안엔 찾아오는 정확한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허함이 찾아왔고 세상에 대한 물음이 하나 둘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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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존재는 생각에 잠긴다.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존재할 필요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없이 외롭다. 세상엔 많은 존재들이 있음에도 진정으로 그들과 소통할 수 없는 이 존재가 오로지 혼자라고 느껴진다. 인간의 몸을 가진 이 존재는 결국 죽음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반드시 지금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그저 거대한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채 발버둥 치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살아온 궤적이 한없이 측은하기만 하다. 존재 자체에 대한 연민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고통스럽다. 계속되는 불명확한 질문에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삶은 어차피 나를 죽음으로 몰 것이고 내가 지금 먼저 죽는다고 무엇 하나 크게 바뀔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나를 지배하려 든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공허함의 파도에 무너지려 한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는 게 나를 이런 질문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게 해 줄 것 같다. 점점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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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인간의 몸을 가진 고독한 존재는 어지러움과 두통을 호소하며 몰려오는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인간 몸의 최후의 방어기제가 발동된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생각들은 인간의 몸이 받아들이기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이른 아침의 기상과 치열했던 업무강도로 지쳐있던 몸은 생각을 멈추고 잠을 자길 원한다. 꿈뻑 꿈뻑. 눈이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감긴다. 앉아 있던 몸에 의지하던 고개 또한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어진다. 고독한 존재는 졸리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저 잠을 자기 위해 조금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만을 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치열했던 세상과의 싸움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지금은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내일은 반드시 답을 찾겠다는 다짐과 오늘의 전투는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후. 그렇게 마지막 순간 죽음의 위기에 빠진 이 존재는 가까스로 구해진 채 잠에 든다. 하지만 결국 정답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내일이 시작되려 한다. 일상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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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일상과 젖어오는 안정감을 한편으로 커져가는 공허함이 근 한 달 넘게 밤마다 나를 찾아왔다. 공허함의 정체에 조금은 도움이 될까 싶어 책 '왜 살아야 하는가'를 펼친 채 수일 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어 한 손가락 개수보다 더 많은 횟수만큼 책을 읽었고, 책을 정리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갑자기 바빠진 사회활동의 영향과 더불어 나만의 철학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책의 성격상 이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시간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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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총 10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멜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니체, 윌리엄 제임스, 프루스트, 비트겐슈타인, 카뮈 까지. 그리고 각 인물들이 주장했던 삶에 대한 철학이 작가인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시선'으로 정리되어 있다. 굳이 여기서 '~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책이 철학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처럼 책의 내용을 그대로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반면, 철학을 다루는 책들은 나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고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크다. 그렇기에 이 책 '왜 살아야 하는가' 또한 그런 범위 내에 속해 있으며, 작가의 의지에 따라 철학자들의 원고를 한번 정제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그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정제 과정은 큰 틀에서 벗어남 없이 잘 이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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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어떤 인물이 어떤 철학의 세계를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낱낱이 이해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철학자들의 논고를 발판 삼아 나만의 철학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였다. 누가 어떤 학파의 영향을 받아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논지를 전개했으며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와 같은 내용은 관련 학과에 근무하는 학자님들을 제외하곤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종합하고 거르는 과정을 통해 우리 것을 만들면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님도 이런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그들이 지내온 삶의 다양한 모습으로 최대한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해 이러한 과정에 조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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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물들의 철학을 한 번에 받아들이는 것은 대학시절 전공서적을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패드에 정리된 것만 21페이지를 넘어간다. 그나마도 한번 정제된 내용을 다시 내 것으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다. 그만큼 독서의 난도가 높았다. 하지만, 높았던 난이도만큼 얻어갈 수 있었던 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세상이 주는 공허함에 지쳐가던 나는 어렵사리 나만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퇴근을 빨리하려 퇴근을 애써 생각하지 않듯, 삶의 공허함이 주는 다양한 물음에 시선을 두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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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공허함은 남아있지만, 더 이상 공허함에 관심을 끄고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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