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저, '1Q84', 2010
최초 작성일 2021.09.22
인연(因緣):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또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을 뜻한다. 일의 내력 또는 이유.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아직 판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구조를 가진 세계이건 나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이 세계에는 아마도 이 세계 나름의 위협이 있고, 위험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 나름의 수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더듬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괜찮다.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달을 가진 이 세계에 발을 딛고 머무는 것이다. 덴고와 나와 이 작은 것, 셋이서.
- '1Q84' BOOK3 제31장 덴고와 아오마메 中 아오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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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건 집과 멀찍이 떨어진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다. 문제는 성장기의 인간이 뿜어대는 각종 페로몬 향과 거친 육체적인 움직임으로 절어있는 땀냄새를 풀풀 풍기는 남학생들이 우글대는 고등학교 생활은 물론, 독립적인 타지 생활까지 동시에 해야 하는 페널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공부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PC방에서 온라인게임을 하며 보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가상공간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소설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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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읽었던 소설책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 코너의 한 칸을 지키던 것들이었다. 흔히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불리는 분들의 책만 골라 읽었기 때문인 탓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님의 '파피용', '뇌', '타나토노트', '신' 등...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의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 '새벽 거리에서' 등...('나미야 잡화점'은 아직 발간되기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진명 작가님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천년의 금서', '고구려' 등이 그 당시, 그러니까 2010년 즈음 읽었던 책들이다. 그런데 이 당시 출간되자마자 최단기간 밀리언셀러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워 눈에 띄지 않으래야 띄지 않을 수 없던 소설책이 세 권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1Q84'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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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당시에 '1Q84'를 읽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I(영문 아이)Q84인지 1Q84인지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제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히려 인기가 많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뭐랄까 나는 유행을 어느 정도는 따라가지만 쉽게 휩쓸리지는 않으며 나만의 주관과 절제된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너와 나를 구별 짓는 큰 차이점이고 그러므로 주관이 있는 내가 주관 없이 유행에 휩쓸리는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속내를 은은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상 야릇한 반발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랬던 내가 이번에 '1Q84'를 읽게 된 건 조지 오웰 작가님의 '1984'를 읽게 되면 서다. 2010년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책을 여러 권 읽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서점에서 두 가지 책을 동시에 올려놓고 표지를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제목에서 무언가 동질감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허무하게 스쳐 지나갈 것만 같던 책과의 인연은 2021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한번 닿았고, 그렇게 이번 추석 연휴를 빌려 '1Q84'를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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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먼저 주인공 중 한 명인 아오마메의 시선을 따라간다. 피트니스 센터 강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어느 날 시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통체증에 신음하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나고자 비상계단을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녀는 몇 개의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서 비상계단을 이용하기 전에 살고 있던 1984년과는 무언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를 Question Mark를 상징하는 Q를 붙여 '1Q84'년이라 부르게 된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가와나 덴고는 아오마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동네 학원의 수학강사로 재직 중인 작가 지망생이다.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편집자로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 소설을 퇴고하는 일을 의뢰받게 되는데, 그 소설은 원래 후카에리라는 소녀의 것이었다. 그 역시 소설을 퇴고하는 일을 맡게 된 이후, 후카에리와 알게 된 이후,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 그 또한 아오마메처럼 '1Q84'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1Q84' 세계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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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에는 소설 '1984' 속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집단으로 묘사되는 '당'과 닮아있는 여러 개의 집단이 등장한다. 덴고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NHK 방송국, 후카에리의 아버지가 교주로 몸 담그고 있는 의문 가득한 종교집단인 선구, 아오마메의 가족들이 열렬하게 믿고 있는 종교집단인 증인회가 그렇다. 이 조직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다. 이곳은 누군가를 뒷조사하는 것은 물론 소리 소문 없이 제거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주변에 피해 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데, 집단이라는 이름하에 각종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주인공들의 가장 가까운 관계는 이런 집단에 속해 집단을 이끌고, 집단에 충성하고, 집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한창의 귀여움으로 보살핌을 받아도 모자랄 시절에 주인공들은 집단에 속한 가족들로부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억압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각기 비슷한 상처를 안은 채 집단으로부터 도망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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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이지만 동창인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에 대한 강렬했던 한 장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1Q84' 세계에 초대받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무엇이 그토록 서로를 이끌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각기 다른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점차 서로에게 가까워져 간다. 결국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는 운명처럼 재회하게 되고, 소설 '1984'의 외롭고 쓸쓸했던 결말과 달리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탄 사이가 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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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소설 '1Q84'는 풍부한 어휘와 찰진 비유가 가득해 작중 내용을 상상하고 빠져들기 쉬운 경향이 있어 독서 후 오히려 깊은 여운을 느껴지게 했다. 여운이 끝나갈 즈음엔 자연한 궁금증이 뒤따라왔다.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사랑(인연)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는 소설 '1984'와 무엇을 다르게 표현했을까, 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여느 미디어에나 심심찮게 등장하는, 특히 한국에서 너무 많이 다뤄지는 로맨스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인연(사랑)의 힘은 위대하다'일까? 작중 피트니스 센터 강사와 의뢰를 받아 폭력적인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일을 병행하는 아오마메처럼 '폭력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일까? 사실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않고 그냥 속에 있는 이야기를 쓴 게 아닐까? 혹시 모른다.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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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실타래처럼 엉켜있어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인연의 끈은 돌고 돌아 끝내 서로를 마주 보게 했다. 어릴 적의 고통도, 집단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도, 비현실적인 존재의 위협도 사랑 앞에선 한낮의 아침이슬 신세가 되어버릴 뿐이었다. 결국 작가님이 세상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거대한 집단의 폭행에 작은 개인이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어쨌든 결국 사랑(인연)때문이지 않을까라고.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나의 인연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고등학생 시절 마음 한 구석에 스쳐갔던 책과 10년 뒤 다시 마주하게 된 것처럼.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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