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23. '글쓰기에 대하여(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by 세자책봉 2021. 8. 28.
728x90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저, '글쓰기에 대하여', 2021

최초 작성일 2021.08.26

2021. 08. 28. 코로나로 어두워진 밤거리를 보며...

이면(裏面): 물체의 뒤쪽 면.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보이는 면보다 진실에 가까운 보이지 않는 면.
이 책은 2000년도 케임브리지대학 강의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글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의 저술 활동에 대한 책도, 특정한 사람, 시대, 국가의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으려나?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중략)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뒤를 조심해요. 누군가 있어요. 습격당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려요. 뱀을 조심해요." (중략) 장해물, 모호함, 공허함, 방향감각 상실, 황혼, 암전 등에 더불어 흔히 투쟁, 행로, 여정 등이 결합되어 있는 것, 즉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 길이 나 있으며 가다 보면 결국 앞을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느낌, 이것들이 바로 글쓰기 과정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의 공통 요소다. 그렇다면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어둠, 그런 욕망에 관한 책이다.
- '글쓰기에 대하여(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 1장 길찾기, 마거릿 애트우드

.

산동네 자그마한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길. 자전거를 타고 옆 동네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던 길. 아침 일찍 시내 도서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 늦은 밤 수업을 끝낸 뒤 학원차를 타고 집으로 오던 길. 그토록 많은 순간 길 위의 나는 애석하게도 혼자였다. 별 수 없었다. 동네가 작아 같은 나이의 친구도 없었을뿐더러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친구가 없었다. 그렇다. 그 길을 나와 함께하던 친구는 조그마한 MP3 속 노래와 책뿐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친구가 없었다는 멘트에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루하고 한물 간 인과관계라고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그들은 그 시절 짧지만도 않았던 길 위의 고독을 달래주기에 충분했고, 그 관계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지금은 Keane의 Somewhere Only We Know를 듣고 있다). 글로써 눈으로, 노래로써 귀로 전달되던 수많은 글자에 둘러싸여 나만의 감정의 홍수에 빠져 지내기를 많은 시간. 어느 날 문득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우연으로 빌어진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는 캐나다 북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영화도, 극장도 없었고 라디오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환경 속에 책이 늘 곁에 있었다고. 일찍이 읽는 법을 배워 독서광이 되었고 지금은 노년의 작가가 되어 그 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하여'를 집필하여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로 깨우침을 유도해 제자들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처럼, 때로는 부드러운 말투로 어린아이들을 훈육하는 선생님처럼 작가의 언어는 노파심이 가득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작가라는 지위가 인정받기 힘들었던 그 시절 캐나다. 특히나 여성으로서는 더욱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했던, 사회 정서상 포기를 강요받았던, 혹 작가로 인정받더라도 제대로 된 서포트를 받기 어려웠던 어둡고 혼란스러운 과거부터 작가의 길을 걸어온 나약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그녀의 노파심은 왜 사람들이 글을 쓰는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굳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누구나 글자를 써내려 갈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이며,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 중 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즉,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이다. 누군가는 글을 쓰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해서, 누군가는 글을 더 잘 쓰기 위해서, 누군가는 또 다른 나(뮤즈가 깨우는 정체성)로 부터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라는 등 다양한 상황들을 가정하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작가는 그리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며 글을 잘 쓰는지 못쓰는지와 상관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

그렇다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정체성을 갖는 작가들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뒤 따라온다. 이번에도 그녀는 다양한 상황들을 가정한다. 누군가는 정신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Self)을 위해서, 누군가는 이런 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Someone)를 위해서, 누군가는 글로써 감정을 보여주고 싶은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지만 어쨌든 작가는 글로써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독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독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책을 읽음으로써 작가와 소통하기 때문에 단수인 독자로 볼 수 있으며, 시작이 어찌 되든 작가라는 사람은 '그들'이 아닌, '당신'인 독자를 위해, '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고.

.

이 외에도 작가들이 마구 휘갈겨쓰는 글에 담긴 윤리와 책임에 대한 사회적인 이야기에 대해,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글로써 유명세를 얻어 작가라는 위상을 얻게 된 후 다시 한번 흔들리게 되는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 걱정하는데, 작가는 내 글을 보여주고 싶고 읽어주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점점 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소규모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게 되지만, 어느 순간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면서 대규모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서 작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내 글을 쓰는 게 먼저인가? 대규모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글을 쓰는 게 먼저인가? 

 

그녀는 위에서 보듯 많은 상황들에 대해 가정하면서 최대한 절충안을 제시하는 성격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역시나 이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친 대답은 하지 않은 채로 글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설명했던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그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 글이 수준이 높은지 안 높은지, 재미있는지 없는지는 '독자'가 판단한다.

.

.

정확히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책 읽는 취미에 정리하는 습관을 가진 한 인간의 내면에서 두 가지 행동이 자연스레 융합된 결과였고, 어쨌건 이왕 글을 쓰기 시작한 거 제대로 써보고자 장르에 무관하게 다양한 글을 무턱대고 섭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소화해가며 짧은 글을 써왔고,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의 국어처럼 문장 구조, 단어의 배치, 쓰임 등의 글 쓰는 행위에 대한 학술적인 내용이 담긴 책은 아니다(오해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읽은 책이 대표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아직까지도 읽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작가 모임에서 집필한 글쓰기 좋은 질문 642, 그리고 글쓰기에 대하여 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님이 설명하던 조금은 암울한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나 쉽게 글을 쓸 수 있다. 멀리 볼 것 없다. 노트북에 무선으로 연결된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이 그렇다. 벌써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아직 한 가지 두려운 게 있다. 너무나도 쉬워진 접근성 탓에 낮아진 문턱으로 입문한 내가,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두렵다.

.

나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나만의 독자에게 좋은 글을 보여주고 싶다. 한 획을 긋기 위해 수백 번 Ctrl+Z 하던 갓착맨이 결국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듯이, 단 한 줄의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짧은 글을 마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