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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21.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by 세자책봉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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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저, '살고 싶다는 농담', 2021

최초 작성일 2021.08.07

2021. 08. 07. 주말엔 와인과 독서를...!

청춘(靑春):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특히 젊은 날은 객관화가 어려운 시기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조직도 어른도 드물다. 정당한 대가를 바랄 수도 없다. 타인에 관한 경험이 적어서 내 불행만이 굉장히 특별하고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 든다고 상황이 개벽하지 않는다. (중략) 매우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여러분은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가치를 부정당할 것이다. 억울할 것이다. 내 가치를 누군가 알아봐 주길 갈망할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적어도 SNS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절망이 커져간다. 하지만 절망에 먹혀서는 안 된다.
- '살고 싶다는 농담' Part 3. 다시 시작한다는 것 中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말, 허지웅

13학번 새내기의 끓어오르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그 말, 밤 12시에도 기숙사 뒤편 편의점에 모여 버드와이저와 KGB를 한 캔씩 마시며 청춘에 대해 떠들었던 지난날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말, 세대를 꿰뚫었던 관통상이 아직까지도 유효해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조하기 힘든 그 말, 지금은 할 수 없는 말,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년은 아플 수밖에 없다는, 마치 그 아픔의 정도가 본인세대 때는 더욱 심했는데 너희가 지금 이 정도로 아프다고 징징대는 건 별 거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나이에 아프다고 하는 건 당연한 거야라는 꼰대적인 내재적 관념으로 똘똘 뭉친 아주 저급하고 비열한 표현. 이는 청년들에게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기성세대가 청년들을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상태로 청년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심만 커지게 만들어 세대갈등의 원인과 명분만 제공한 채로 사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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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처럼 청년이라는 주제를 그저 상업적 소재로 사용했던 여타 작가들과 달리, 허지웅 작가님은 그간 방송과 SNS, 블로그 등을 통해 청년문제에 대한 예리한 지적과 날 선 비판을 해왔던 걸로 유명하다.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 허지웅 작가님은 조금 무뎌지기는 했으나(무뎌진 이유에 대해서는 책에 잘 나와있다...), 아직도 청년문제 대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모멘트로 청년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이것도 상업적인 것이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기만은 하지 않는다...). 또한 작가님의 이전에 비해 조금은 무뎌진 날 선 감정들은 잘 녹여진 쇳물이 날의 기초를 잡고 있는 듯 청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다독여주는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한 번 심하게 아프고 나면 인간이 변한다고 했던가 여하튼. 한편, 과거에 영화평론을 했던 경험자답게 글 속 곳곳에 영화적인 소스를 버무려놓은걸 볼 수 있는데 언급하는 영화를 봤던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될 테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 글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워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故 김영애 님 주연의 '깊은 밤 갑자기'를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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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침착맨 마인드로 가자. 책을 보는데, 책 속에 언급하는 영화를 보지 않아서 글이 이해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게 되었다.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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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요즘 느끼고 있던 복잡한 감정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하나의 문장이 더 있었다. 그건 아래와 같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 '살고 싶다는 농담' Part 1.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中, 허지웅

글머리 인용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적어도 SNS에서는 그렇게 보인다.'와 같은 맥락을 지닌 문장이다. 슬프고, 우울하고,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녹아있는 우리의 인생과 달리 SNS는 대부분 좋은 모습만 모여 있는 사진첩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현실의 인생 속 나와 상반된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이 가득한 SNS를 보며 현실을 더욱더 불행하게 느끼고, 비관하고, 나와 달리 행복하기만 한 상대방의 모습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그것이 비록 현실이 불행하지 않은 인간이더라도 점차 위 같은 감정에 동조되어갈 따름이다. 나 또한 이런 감정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무언가에 비관적이고 차가운 생각이 가득해지면 아득히 원론적인 것부터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영향인지 비관을 넘어 삶이란 혹은 사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고, 나도 모르게 잘 보이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행복이라는 거대한 관념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처럼 단순히 나의 DNA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결격사유가 너무나도 많았고, 죽기 위해 살아간다는 무성의한 답에 대해서는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게 난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헤매다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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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두 번, 세 번 읽었음에도 여전히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허지웅 작가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받을 수 있었다.

나같이 아팠던 사람도 살고 있고, 안 아픈 사람도 살고 있고, 다들 살아가고 있다. 우리 힘내자.

그냥 살아갈 뿐이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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