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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5. '숨(EXHALATION)', 테드 창(Ted Chiang)

by 세자책봉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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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EXHALATION)', 테드 창(Ted Chiang) 저, 2019, 엘리
최초 작성일 2022.01.23

2022. 01. 23. 평행우주의 갈래에 있는 수 많은 나도 지금 이 순간 레드와인을 마시고 있을까?

자아정체성(Ego identity, 自我正體性): 자기 자신의 독특성에 대해 안정된 느낌을 갖는 것으로, 행동이나 사고, 느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가를 일관되게 인식하는 것. 다양한 자기 대상 교류에서 나온 서로 다른 동일시가 하나의 주된 성격 조직으로 통합되어 느껴지는 자기감.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예측기가 당신에게 끼칠 영향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숨' Part3. 우리가 해야 할 일 中,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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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종종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는 듯 기묘한 순간이다. 마치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1인칭의 나에서 자동차의 어라운드 뷰가 보여주는 화면처럼 3인칭으로 옮겨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어느덧 서른이 되어버린 내게 크게 당혹스럽거나 어려운 순간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달가운 만남도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저 여러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익숙한 척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봐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유체이탈적 시선 변화는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러면 나는 거시적으로는 연속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미시적인 순간들의 연속성이라고는 치즈케이크의 부스러기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 순간이 불분명한 내 인생의 항로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다. 위대한 항로의 한 복판에 멈춰 선 내 주위에는 나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런 기척도 없다. 점차 시선이 변하고, 변화된 시선은 나를 향한다. 어느새 나는 - 인간을 내려다보는 신이 있다면 - 신의 모습이 되어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멈춰 선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정확하게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고,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재'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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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현재 몸담고 있는 직장을 선택하기 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곤 한다. 특히 이 시점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인생에 드물게 찾아오는, 어떻게 보면 인생의 존망이 달린 선택의 순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학업적이거나 연구적인 능력은 부족했지만 문제 해결 측면에서 몇 차례 성과를 보이는 등 두각을 보였고, 해당 과목의 교수님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연구하면서 부족한 공부를 더 하는 것에 대한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전공과 관련하여 연굿거리(=연구할 만한 것)도 없었거니와, 학업적인 호기심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하고 싶은 생각보다 적당히 좋은 직장에 취업해 세상을 배우고 싶다는 호기심이 조금 더 강했다. 또한 당시 사회적으로 흔히 퍼져있던 이야기로, 대학원에 -특히 자대 대학원- 진학하는 것은 사회 도피성이 짙은 행위기도 했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성격은 못되지만, 나 역시 소위 저명한 대학원을 목표로 했다거나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 등의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에 대해서는 꽤나 회의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판단과는 무관하게 이미 나의 장점이 드러난 분야에 집중하는 것 또한 꽤나 합리적인 선택사항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점점 더 생각할수록 이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도 명백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인생과 곧바로 취업하는 인생을 머릿속에 계속해서 그리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각종 잔꾀를 부려봐도 여전히 미래는 알 수없었다. 결국 어느 한쪽도 명확하게 선택하기 어려웠던 이지선다형 문제에 답을 선택하게 된 건 약 5개월 뒤인 4학년 여름방학 무렵이었다. 평소 관심 있던 에너지 관련 모기업에 채용된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항로는 결정되었고, 나는 대학원의 길을 제쳐둔 채 취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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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이유에서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직업의 선택권이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 것일까. 마치 스스로가 신이라도 된 듯 나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요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 자체는 별 다른 의미 없이 그동안 나를 이뤄왔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그치는 듯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행위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또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재차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아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이런 와중에 하필 직업과 관련된 순간을 회상하게 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발현된 것일 가능성이 큰데, 그것은 그만큼 자아정체성이 직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눈떠있는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인을 기준으로 출퇴근 및 점심시간 포함 10시간 이상- 본인의 직업을 유지·보수를 위해 사용한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이상의 시간을 자신만의 업무에 할애한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들은 배우는 일을 한다. 우리가 흔히들 꿈꾸는 건물주도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세입자를 관리하기 위해, 건물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전문 위탁업체에 위임했더라도 또 다른 본인만의 일을 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는다는 이미지를 노출시키지만 사실 나름 자기만의 또 다른 일이나 직업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자아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직업을 이루고 직업은 우리를 이루며 직업으로부터 스스로를 증명한다. 물론 직업만이 자아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과 별개로 취미를 통해, 관계를 통해 유지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의 많은 부분을 직업이 차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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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반론을 할 수 있다.

아니, 하루에 두 시간만 일하고 취미로 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물론 그렇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건물주의 모습, 주식 트레이더의 모습, 직장인에게는 훌륭한 퇴사자의 모습이 대부분 이렇다. 노동을 적게 하고 취미를 많이 즐기는 사람들. 그런데 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만약 위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의 직업은 '취미를 하는 사람'이고 그의 자아정체성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 또한 취미생활일 것이라고. 아마 그 사람은 본인을 '취미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확률이 높다. 만약 누군가 '나는 축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실제 축구선수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은 '두 시간의 일을 하는 직업'과 '열 시간의 취미를 하는 직업'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이 두 시간을 일한다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만큼 노동에 부담을 덜 느끼고, 본인의 시간을 조금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비교적 자유로운 또 다른 직업을 -취미를 하는 사람-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두 시간의 노동이 돈을 벌어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직업적인 우위를 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 얘기가 사전적인 의미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면 직업과 취미를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놀림받아야 마땅한 의식의 흐름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매일 두 시간만 일하고, 취미에 열 시간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본인의 일과 취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가 더 의문이다. 취미에 심취한 나머지 취미가 일이 되어버려 더 이상 취미를 취미답게 즐기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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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면욕이나 배설욕처럼 생존의 하위 개념들을 취미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아무리 잠을 자는 것이나 누워 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 누구도 자신을 '나는 자는 사람입니다' 또는 '나는 누워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자아정체성을 더 흐리게 만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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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직업을 - '직업'이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더 포괄적인 '본인의 일'로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선택하는 것은 자아정체성을 위해서도, 인생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잡힌 채 무수히 많은 선택지에서 단 한 가지 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시에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또한 나도 내가 한 선택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듯, 본인의 선택에 대해 백 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 말마따나 본인의 직업을 천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10%도 안된다는 것처럼, 아직 나도 내가 선택한 직업이 하늘이 내린 직업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닌지,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테드 창의 소설 '숨' Part1.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등장하는 시간을 거스르는 문을 통과해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되돌아 가봐야 과거를 바꾸지 못할뿐더러 바꾼다고 한들 이번엔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다니는 건 어땠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숨' Part9.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 나오는 프리즘이 현존한다면, 평행 세계의 내가 선택한 길은 어떤지 프리즘을 비춰보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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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다. 그는 매번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성찰을 유도한다. 이러이러한 것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떻냐는 그의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책 '숨'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자유의지', '나의 선택', '현실세계의 나'와 같이 '나'와 관련된 키워드들이 등장한다. 콕 집어서 얘기하긴 어렵지만, 책 '숨'에 담긴 테드 창의 물음은 대체로 '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와 비슷한 맥락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하필 안 그래도 인생의 목표는 곧 퇴사라는 강력한 제언을 여기저기 해대는 통에 아직도 명확하게 자리잡지 못한 나의 정체성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물음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송곳 같은 물음에 쉽게 무언가 내뱉을 수 없어 오랜 시간 나의 과거를 다시금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도 훌륭한 철학적 소재를 아름다운 내용으로 담아낸 그의 글재주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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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게에 있는 당신의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의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 주고 있는 거예요.
-'숨' Part9.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中 p.477

 

이번 책 '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스토리는 평행 세계와의 소통이 가능해진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Part9.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프리즘은 현 세계와 평행 세계 사이의 연결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장치다. 그런데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과학기술의 집약체 그 자체인 프리즘이지만, 프리즘이 널리 보급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특이한 병에 걸려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로 '프리즘 중독'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어떤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행위가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평행 세계에 무한히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행위를 보고 나서야 현실의 판단을 이어가게 되는 모습에, 마치 오늘날 스마트폰을 사용해 매 순간 인터넷을 뒤지며 나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타인의 선택에 의존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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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누군가 예쁘다고 하는 옷을 구매하고, 유명인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구매하고, 성능이 좋다고 하는 제품을 구매하고, 힙하다고 하는 카페에 반드시 들러야 하고, 맛집이라고 하는 곳은 차를 타고서라도 가야 하고, 예뻐 보이는 관광지에도 반드시 가봐야 하고, 남들이 하는 운동을 따라 해야 하고, 노래는 반드시 Top 100 리스트에 있는 곡을 들어야 한다. 이 페이지를 가득 채울 만큼 더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미 현대 사람들도 많은 곳에서 타인의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 접근의 용이성과 다른 '정보의 의존'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를 멈추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에게 무수히 많은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지만, 그것들 중에 자신만의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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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만 매달려 있기엔 아까운 시간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흘러간다. 나는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직업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은 뒤로하자. 어쨌든 나의 정체성을 가장 크게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현재 직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과거는 돌릴 수 없다. 또한 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더욱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에 집중하여 내 존재의 의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혹시 나는 지금 내 정체성에 '직장인으로서의 직업'과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직업'에 대한 비중을 바꿔나가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현 직업에 집중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더 강화하고 나를 발전하는 길인지, 하루빨리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고 나와 궁합이 더 좋아 보이는 길로 진로를 변경해 나의 정체성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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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정체성 뜻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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