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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6. '사랑에 빠진 여인들(WOMEN IN LOVE)',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by 세자책봉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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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들(WOMEN IN LOVE)',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저, 2020, 을유문화사
최초 작성일 2022.03.04

2022. 03. 04. 소장하고 싶어지는 을유문화사의 한정판 책표지 디자인.. 그저 감탄.

고전(古典): 옛날 법식(法式), 또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가치를 인정받아 전범(典範)을 이룬 작품.  클래식. 
그녀는 죽음의 경계선인 어둠 속에 뭉개져 없어진 것처럼 앉아 있었다. 자신이 일생 동안 얼마나 이 벼랑 끝으로,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사포처럼 미지의 세계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벼랑 끝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임박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마약과도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이 죽음 가까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일생 동안 성취의 선을 따라 여행해 왔고, 이제 그것이 거의 끝나려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게 되었고, 경험해야 할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일종의 쓰디쓴 성숙 속에서 완성되었으니, 이제 나무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성장을 달성해야만, 모험을 끝까지 이행해야만 한다. 다음 단계는 경계선을 넘어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 그때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모종의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 '사랑에 빠진 여인들' 15장. 일요일 저녁 中,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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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언젠가는 고전 같은 글을 꼭 써야지’. 그런데 내가 일찍이 고전을 좋아했고 많은 고전을 읽었을 것 같은 목표를 가졌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다. 고전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 내게도 고전은 대부분 지루했고 진부했다. 고전은 항상 옳고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전 속 인간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 듯했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 안 되며,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도 안됐다. 고전은 매번 좋은 얘기와 뻔한 결론뿐인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이나 색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SF소설과는 달리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담긴 글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또한 당시의 나는 결과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표현하면 결과중심주의가 천명되던 대한민국 사회의 요구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물결에 표류하고 있었다. 학교는 시험 점수로 나를 줄 세웠고, 시험 결과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실이 싫었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세상에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점수만 잘 나오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감정이야 어떻든 나도 결과를 내야만 하는 학생인 건 변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반사회적인 생각과 그럼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뉘었다. 나는 주위의 것들은 볼 수 없는 채로 결승선을 향해 뛰어가야 하는 검정 눈가리개를 쓴 한 마리의 경주마가 된 듯했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매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기 바빴다. 이 같은 마음가짐에 고전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결국 나는 고전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해 쉬운 글로 쓰인 소설을 손에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 물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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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좋아지게 된 건 학생 신분을 벗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 나서다. 취업을 하기 전, 나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겐 취업만이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다. 취업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행위를 취업으로 집중했다. 그리고 결국 꽤나 만족스러운 직장으로 취업했다. 그런데 나는 취업을 하고 한동안 심각하게 방황했다. 성취는 곧 공허를 가져왔고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마음속엔 엄청나게 큰 빈 공간이 자리 잡았다. 도대체 앞으로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삶의 목표를 이룬 동시에 삶의 의미를 잃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취업 그 이상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기란 어려웠다. 방황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내 삶의 근간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지하 속을 내달렸다. 더욱 비참한 것은 아직도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결과중심주의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대책 없는 미래에 내던져진 꼴이라니. 결과에, 사회에 그리고 인생에 크게 한 대 맞은 듯했다. 나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결과를 잃고 흔들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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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사회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들을 성취하는데 몰입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진 기계처럼 행동했다. 그것의 과정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든 결과만 잘 만들어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무한한 동력만 주어지면 평생 움직일 수 있는 기계와 달랐다. 설계된 한 가지 패턴만 반복하는 기계와는 달리 생을 직접 설계하며 사는 존재였다. 내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여태껏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헐벗은 존재라는 사실이 싫었다. 초라한 나의 모습을 하루빨리 바꿔야만 했다. 나는 이제야 나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나는 문득 손에 집히는 종이에 아무 의미 없는 낙서를 하다 긴 직선을 그렸다. 그리고 1~10까지 균일하게 십 등분했다. 1은 시작을 의미했고, 10은 성취를 의미했다. 한동안 멍하니 십 등분된 직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뇌리에 무언가 스쳤다. 이거였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도 아니고 10도 아니었다. 그것은 2~8까지 시작과 성취보다 더 긴 시간을 자리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이는 과정이 내 인생의 대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인생은 성취의 연속이 아닌, 과정의 연속이었다. 물론 결과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생에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고 있었다는 자괴감과 동시에 이 사실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에 안도함을 의미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또한 인생의 의미는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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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이 바뀌자 고전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전은 그 어떤 것들보다 소중했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늦게 알아버린 나머지 그간의 독서가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글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글에 당시의 시대상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적인 반영일 수도 있고, 작품 속 묘사된 주인공 시대의 시대적인 반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고전에는 시대 묘사가 아주 잘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적인 시대 묘사는 더욱 무게감 있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밀도 있는 현장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둘째, 절정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끔 이들의 내면 묘사는 현실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적나라하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미시적인 묘사는 이야기의 다채로움과 흡입력을 동시에 일구어 내용에 재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 심리 묘사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통렬함에 찔리거나 속을 들킨 민망함에 찔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셋째, 사유할 거리를 던져준다. 고전에는 살면서 사유해볼 만한 주제가 한 가지 이상 등장한다. 함부로 답을 내리기 어려운, 그러나 누구나 개인적인 답을 갖고 있는 질문들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꽤나 철학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언급할 때도 이야기의 전개에 전혀 이질감이 없는 것이 고전의 특징이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스며들게 될 테니 말이다. 결국 고전의 참 맛은 이야기의 결과나 피날레보다는 이런 것들이 잘 반영된 이야기의 진행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이는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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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20세기 초 영국 사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국의 20세기 초반은 두 번의 세계대전이 증명하듯 사실상 전쟁의 시대였다. 그러나 비단 전쟁만으로 이 시기의 영국 사회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뿐만 아니라 석탄회사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었고, 여성들은 선거권을 얻기 위해 인권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전쟁과 파업 그리고 인권 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20세기 초반 영국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작중에도 시대를 암시하는 다양한 키워드들이 등장한다. ‘전쟁의 경험’을 갖고 가문의 ‘석탄회사’ 경영을 돕고 있는 제럴드, 석탄회사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 사태를 겪은 제럴드의 아버지 토머스, 여성의 탄압을 극도로 경멸하며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동생 구드룬 등.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배경과 성격, 이들이 나누는 모든 대화에서 시대를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충분한 시대적 묘사는 이야기에 몰입감과 현실감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이는 작품이 약 700페이지가 넘어가는 장편 소설임에도 지루함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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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작중 묘사되는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구한말 강제적인 한일합병조약으로 한반도를 일본에게 빼앗겨버린 20세기, 영국은 이미 17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경제력과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작중 석탄산업이 하향세에 직면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는 과정에 노동의 추악함을 들먹이는 히피들의 대화는 우리나라의 작금의 현실을 빼다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요즘 들어 부쩍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노동의 가치가 하락했다’. 한 때 노동은 순수한 것이기도 했으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재화와 연결되었고 점차 노동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재화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치에 따라 더 나은 노동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재화의 양은 한정적이고, 한정적인 재화로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점점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으로라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올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 저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실제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소련의 바람과 달리 공산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작금의 현실은 엄밀히 얘기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진 것이지 노동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류 노동은 계속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다른 종류의 노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의 주류 노동이 석탄산업에서 중공업(석유, 자동차)으로 대체되었듯, 21세기 우리나라 주류 노동이 제조업에서 IT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노동의 가치가 하락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재화가 대물림되고 재화가 재화를 쉽게 벌어들이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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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 장 폴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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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강점은 작중 인물의 내면을 아주 섬세하고 심도 있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구드룬의 언니인 어슐라와 버킨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묘사는 정점을 이루고 있다. 버킨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엄연하고 비개인적이며 책임을 초월한 최종적인 내가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당신도 존재하죠.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곳에서예요. 감정적인, 사랑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아무런 말도 합의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엄연한 미지의 두 존재요, 완전히 낯선 두 생물이죠. 거기서 난 당신에게 다가가길, 당신이 내게 다가오길 원해요.

 

어슐라가 이에 답한다.

그건 그냥 순전히 이기적인 거예요.

 

어슐라는 서로 간의 평범한 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버킨은 평범함을 넘어 스스로도 잘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성숙한 사랑을 원하고, 여기에 서로 간의 이해에 충돌이 발생한다.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서로가 추구하는 사랑의 이해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작품 곳곳엔 이런 식의 분명하고도 미묘한 내면을 미시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뽑으라면, 버킨이 어슐라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채 완벽한 타인으로도 존재하고 싶어 하는 양립적인 욕망에 대해 고뇌하는 장면을 뽑고 싶다. 지나치게 가까운 것과 너무 먼 것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 있고 싶은 욕망.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싶지만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쉬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현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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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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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뜻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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