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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직업 강연을 마치며

by 세자책봉 202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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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이 가져온 일곱 병의 서로 다른 술처럼, 우리는 모두 다르고, 저마다의 맛과 향을 간직한다 - 잃어버린 어젯밤 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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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강연을 마치고 어느새 2주가 지났다. 그간 글을 작성하지 못했던 것은 본업이 바빠졌기 때문이고, 오랜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이고, 이러저러한 핑계로 미뤄왔던 회식자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자기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건 다 핑계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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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설렘 탓인지, 긴장했던 탓인지 평소 출근 시간에 맞춰 잠에서 깨던 시간보다 무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아산까지는 대략 1시간이 걸리는 터라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아침 공기는 선선했고, 간단한 아침운동으로 몸을 깨운 뒤 바나나를 입에 문 채 아산으로 향했다. 직업 강연의 대상은 기업에 입사하길 원하는 고등학생들이었다. 강연 장소에 도착하자 마침 학생들이 등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학생회로 보이는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정문 앞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두꺼운 선팅으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하게 가려진 자동차 안에서 나 홀로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책임감 있는 친구들이 있다니,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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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 들어가자 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분야의 강사님들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주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려는 학교 측의 노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박수 짝짝. 우리는 곧 각자의 강연 장소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아침을 이겨내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분위기는 굳어졌지만, 자유로운 수업이라는 말을 하자 아이들의 경직은 눈 녹듯 사라졌다. 강연 초반엔 입이 덜 풀려 조금 고전했지만, 강연은 그럴듯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잦은 PC방 출석과 오락실 동전 노래방 기기에 매일 오백 원을 상납하던 내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과는 상반된 몇몇 아이들의 강렬한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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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 강연이라는 주제에 충실하고자 절반의 시간 동안은 직업 설명을 했고, 나머지 시간은 직업 선택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초점은 후자에 맞춰있었다. 특정 직업에 대한 내용이야 어쨌든 직업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직업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행위를 하기 전, 그러니까 어느 정도 직업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의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실제로 직업을 선택해보지 않고는 직업에 대한 판단을 섣불리 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천직 일정도로 잘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자기 자신의 경험 없이 타인의 언어로 표현된 것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이러거나 저러거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에 달려있지만, 그것을 선택하려는 알고리즘을 어떻게 최적화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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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공대생답게 내 강의 자료에는 정량적인 정보가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숫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60살까지 주어진 시간은 20살 기준 약 350,000 시간. 그리고 내 계산에 따르면, 취업을 선택하면서 직업에 소비하는 시간은 60살까지 최소 100,000 시간. 60살까지의 인생에 대략 30% 이상의 시간을, 그러니까 매일매일 하루에 7~8시간의 시간을 조직에 쏟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취업을 하는 것이 내 인생에 이 정도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니. 그것도 취업을 한 지 5년이 지난 이 시점에 말이다. 강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던 결과에 나는 허탈했다. 눈가리개에 씐 채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경주마처럼 반드시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좁은 시야로 자격증을 얻고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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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나의 직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이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내가 직업을 선택할 때 세상을 넓게 이해하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아쉬웠다. 누군가 내게 직업의 현실에 대해, 특히 취업의 현실에 대해 조미료를 조금 첨가해줬더라면, 시야를 조금만 넓혀줬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은 취업을 하기에 앞서 폭넓게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였고, 내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만큼은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일러주는 것이었다. 동아리 활동하랴, 술 마시랴, 게임하랴, 공부하랴, 과제하랴, 자격증 따랴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소홀했던 지난날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랬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떠한 성향을 갖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주변인의 선택을 쫓고, 사회의 흐름에 뒤꽁무니를 붙잡았던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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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호수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벚꽃나무에는 꽃잎이 다 떨어졌고 푸른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늦은 시간까지 호수 주변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울컥해지는 마음이다.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아이들에게 자신 있는 말투로 스스로를 알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라고 단단하게 일렀건만 정작 그런 말을 흘린 내가 흔들리는 꼴이라니. 그러고 보면 수능 성적에 마음 졸이던 10대나 취업에 간절하던 20대나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30대가 된 지금도 불안한걸 보니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건 나이와 상관없나 보다. 이러한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래,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을 뱉는 건 내가 아니지. 마음을 가다듬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자.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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