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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나와 관계없는 죽음

by 세자책봉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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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25. 지나가는 생각의 계절, 가을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정확한 시점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는 지금 당장 도로에 나가서 언제라도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죽음은 우연이고 필연이다. 그래서 장례문화는 인류 문명과 떼려야 뗄 수 없으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 문화를 구성하는데 기여하는 주요 문화 중 하나다.

고대에서부터 인류는 죽음을 신성시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경건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였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일간 장례 의식을 -심지어 부모상일 경우 몇 년 단위로- 치르기도 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 그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작은 무덤에서부터 청동기 시대 고인돌, 크게는 고대 로마의 카타콤(Catacom)이나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독일 수도 베를린에 만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Holocaust Mahnmal), 우리나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형태의 문화 또는 풍습의 명맥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유효했다. 그들이 죽음을 다루는 태도에는 분명 진지함과 숭고함이 묻어 있었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인 듯 신중했다. 장례문화를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소재로 이루어진 작품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교적인 영향이 강했던 탓도 있다. 한때 선과 악, 삶과 죽음의 행태는 인간의 본성이었고 최소한의 인간성에 대한 기준이었다. 넘을 수 없는 무엇이었고, 넘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로부터 비롯된 태도는 다음과 같다. 죽음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죽음은 귀찮은 일이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뒤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직접 닥치지 않은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죽음과 나의 인생은 철저히 구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에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물질적 손해도 없으며, 그렇게 될 것도 아니다. 나의 죽음도 다른 이의 죽음도 특별한지도 모르겠거니와, 실제 고통스러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상대방이 죽든 말든 나와 관계만 없다면 별 관심이 없다. 죽은 자들은 산 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내가 주의해야 할 것은 죽음이 내 자산가치에 영향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 변해간다. 실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여러 복잡한 절차들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모든 것은 상조에서 알아서 해 줄 일이 되었고, 우리는 그저 장례식장에 자리만 지키면 되는 것으로 세상은 바뀌었다. 우리가 갈 곳은 장례식장과 납골당 단 두 곳이면 된다. 그나마도 1년 뒤부터는 납골당만 가면 된다. 번거롭게 어디 산 중턱에 있는 무덤 앞으로 성묘를 갈 필요 없이, 근처에 있는 납골당까지 차를 타고 가면 될 일이다. 갖가지 음식을 만들며 잔뜩 예를 갖출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종교의 영역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변하는 것이지 싶다.

우리와 죽음과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죽음에 대한 많은 것들은 허례허식일 뿐, 굳이 드러낼 정도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한 것이며, 최대한 줄여 마땅한 것이 되었다. 누구나 하는 것이며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귀찮은 것이며 줄여야 하는 것. 어쩌면 죽음은 동네에 돌아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쉬워졌다고 표현하면 정말 너무 쉬운 것이 되었다. 죽을래 라는 표현이 정말 죽이지 않을 말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은 그저 산 사람들이 어렵게 해오던 여러 행정적인 절차를 간소화한 것일 뿐이다.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고,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쉬워진 것을 넘어서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얼마 전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의 중재안을 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일이 있었다. 그의 중재안은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수복한 크림반도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하는 대신 러시아의 것으로 남겨두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 우크라이나인들은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냈으며, 머스크의 트윗에서 열린 해당 안건에 대한 찬반투표는 60%의 반대표를 얻으며 충분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머스크는 여전히 자신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고, 스타링크 역시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이라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데 나는 일전에 일론 머스크가 암호화폐 시장에 대해 트윗을 마구 날리는 모습을 보고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돈도 있을 대로 있고, 트위터 인수를 계획할 정도로 자신이 인플루언서라는 것을 누구보다 크게 자각하고 있으며, 세계의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사람이 느닷없이 로켓 모양의 트윗과 ‘To The Moon’을 쓰는 것엔 분명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는 아무런 의도 없이 트윗을 할 인물은 아니다. 물론, 자신이 투기하고 있는 암호화폐의 가격 상승을 위해서 트윗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정책 가이드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은 암호화폐 시장에 대해 정부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가격을 마구 변동시키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 SEC, 연준 당신들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리고 실제 얼마 뒤 세계 각국에서는 앞다퉈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같은 이유로 이번엔 피해국을 상대로 전쟁 중재안을 내는 일론 머스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도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평화다. 감정에 속아 더 이상 전쟁을 확산하지도, 전쟁의 피해를 만들지 말자는 의도와 더불어 기업가인 그는 전쟁이 끝나고 하루빨리 세계 경제가 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상 경제 불황은 지속될 것이고, 핵전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전기차를 생산하는 테슬라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무역망을 비롯 세계 인프라가 원활하게 돌아가길 바랄 수밖에 없다. 전기차의 가격과 수요는 세계 경제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그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전쟁을 향한 거대한 여론은 고작 기업가와 인플루언서에 불과한 자신이 어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한 우리나라의 여론 역시 전쟁을 옹호하는 입장이 다수를 차지한다.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가 반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피해자인 우크라이나는 당연하게도 선, 침략자인 러시아는 악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지금 우크라이나가 하고 있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전쟁이 우리나라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그들의 죽음은 아무런 상관없이 고작 스크린을 들여다 보고 한번 터치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해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군인 출신의 여러 유튜버들에게 왜 본인들은 참전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전쟁은 전쟁 국가가 아닌 이상 긴 전쟁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해져 버렸고, 사람들은 실제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토록 무심하게 받아들여지던 때가 정말로 또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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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전쟁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데에 있다. 선과 악이라는 흑백논리에 취해 전쟁을 사람의 목숨과는 상관없는 거대한 놀이쯤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그만두는 편이 낫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반격하는 행동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한나 아렌트가 집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오는 표현처럼 러시아가 아무리 악하다고 할 지라도, 러시아에 사는 모두가 악한 것은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하루아침에 떨어진 동원령으로 자기도 모르게 전쟁에 참여하게 된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을 모두 악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진정 선과 악이 구별되는 세상인 것일까. 아니, 우리는 이미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배웠다. 극단으로 치우친 신념은 파시스트와 홀로코스트를 만들어 냈고, 인류 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두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이 점점 죽음을 경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최근 모 웹툰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자비한 주인공과 상대방을 죽이라는 주인공의 명령에 눈가와 입가에 웃음을 띠며 명령을 수행하는 동료들이 그려진 작화는 살면서 본 만화 중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주인공이 무자비한 것을 떠나서 주인공이 하는 행동은 무조건적 선이고,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기에 당연한 듯 그려진 웃음은 누군가를 죽이라는 말과 결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행동에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무리 만화일지라도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어떠한 심리적인 반향이나 고뇌조차 없는, 심지어 그런 명령이 아주 정당한 듯 웃으며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나오는 웹툰이 일간 상위권을 놓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해당 작화를 잘못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의도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심지어 그런 명령을 수행하는데 웃음을 짓는 모습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인간 궁상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철학적인 서사가 담겨있던 작품들이 많았기에 이런 것들을 보며 과거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다)

왜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냐는 이야기엔 별로 대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그까짓 웹툰 보는데 그러면 그림을 어떻게 그리라는 거야?라는 식의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웹툰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죽음은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이고, 이야기의 과정 중에 하나로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에 대한 경시적인 태도가 사회적인 흐름이 되고,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매김하는 순간 이런 식의 사고는 파시스트와 별 다를 바 없어지게 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안 그래도 세상이 평화를 멈추고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마당에 우리의 의식마저 변해버린다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될 수도 있다. 결코 죽음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가볍게 여길수록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되돌아올 것이다. 어차피 필연적으로 죽는 마당에, 죽음을 멀리 둘 것도 없다. 그러나 죽음이 가진 숭고함 만큼은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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