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 저, '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4
최초 작성일 2021.05.16
주지적(主知的): 이성, 지성, 합리성 따위를 중히 여기는 것.
주정적(主情的): 이성이나 의지보다 감성을 중히 여기는 것.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 허지웅 작가
일 년에 며칠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심연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우울감을 느끼곤 한다. 더 슬픈 것은 우울할 때면 찾아오는 인생의 쓴맛과 짙은 회의감 같은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나눌만한 그 어떤 사람도 내 옆에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네가 아직 반려자를 찾지 못해서 그렇거니 하며 비아냥댈지 모르겠지만, 이는 그 정도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감정 혹은 그런 이야기들을 100% 온전히 이해해줄 누군가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인지할 때에 그런 우울감이 찾아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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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작아질 것만 같은 나를(실제론 그리 작진 않다) 인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내 독서 습관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고, 내가 고민하던 것에 무언가 도움이 될 것 같이 생긴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설명서류의 책(교육, 기술, 역사, 문화 등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또는 소설에만 빠져 지냈던 전형적인 이과생은 남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특히 에세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이과생은 오늘 이렇게 허지웅 작가님의 에세이인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고 짧은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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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님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마녀사냥과 썰전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간간히 보면서 였다. 조금은 약해 보이는 체구에 반해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 심지 굳은 그의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그 어떤 패널보다 본인의 소신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밝히던 모습은 진짜 멋 그 자체였었다고 본다. 허지웅 작가님의 책 '버티는 삶에 관하여' 에도 역시 감정적으로 취우칠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해 가능한 이성적으로, 나름의 합리화로 대중에게 전달하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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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본인, 가족, 세대, 사회,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마치 삶에 대해 기가 막힌 해답이나 대단한 통찰을 얻은 듯한 제목 '버티는 삶에 대하여'와는 반대로 아주 일상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본인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전수전 인생의 평지풍파로 주름살 가득한 나이 지긋하게 잡수신 노인이 알려주는 경험론적 지식에 근거한 삶의 교훈 같은 것도 아니다. 지극히도 일상적이다. 특히 4부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마치,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평론을 하기도 하면서 그냥저냥 이러고 살고 있어요'
라고 덤덤하게 본인의 일상을 소개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냉소적인 그가 '버티는 삶에 관하여'라는 사뭇 거창해 보이는 제목으로 독자들을 압도시킨 후에 말하고자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언가 한두 가지로 특정 지어 설명하기 힘든 또는 설명할 수 없는, 삶 그 자체를 그만의 방식으로 합리화를 하다 보니 일상이라는 것, 하루하루가 삶이며 그것을 버텨내는 게 결국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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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아직도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물론, 몇일 뒤면 아무 일 없듯 정상인의 삶으로 복귀할 테지만 그래도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는 것에서 삶에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이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글쓰는 동네형이어서 참 다행이라고 안심하며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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