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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17.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by 세자책봉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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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저, '태고의 시간들', 1996

최초 작성일 2021.05.31

21. 05. 31. 바쁘지만 바쁠수록 책을 더 읽는다는 마인드..!

태고(太古): 아득한 옛날. 책 中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지점. 시공을 초월한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단어.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상상은 물질의 파편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삶의 기류에 융합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뭔가가 뒤틀리면서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그것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물론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 파푸가 부인의 시간 中 스타시아

 

경제 공부한답시고 뒷전으로 밀려있던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천안의 서점 한편을 둘러보던 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거대한 표지 덕분에 눈에 띄는 작품이 없어 빈 손으로 돌아갈 처지에 있던 인간의 레이더 망에 띄게 되었고, 이는 곧 훌륭한 책일 것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게 되었는데, 프레임이 생긴 것에 대한 불편함이 생겨 읽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책이다. 다행스럽게도 항아리에서 오랫동안 잘 묵은 김치를 꺼내듯 1년 동안 마음속에서 숙성된 책은 묵은지의 쿰쿰한 냄새처럼 약간의 거부감이 여전했지만, 그 맛의 깊이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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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태고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고는 위 인용에서도 볼 수 있듯 사전적 용어로는 아득한 옛날을 의미하고 한 마을의 지명(地名)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책의 첫머리에도 나와있듯 시공을 초월한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라는 표현은 태고라는 마을의 지리적 위치를 어느 한 곳으로 국한시켜놓지 않음으로써, 독자들 개개인의 상상력이 투영된 마을을 형상화할 수 있게 하고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여 더욱 책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독자들의 심리적 흐름을 꿰뚫는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어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님에 대해 찾아보니,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참고. 때로는 경건하기도, 때로는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세계관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할 듯싶다. 또한,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가 겪었던 전쟁 역사(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이 큰 틀에서 이야기의 흐름에 자리 잡고 있어 이야기에 현실성을 더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책은 인생이라는 혹은 역사라는 방대한 흐름에 동참하지만 비치지 못하는 주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전·후 전쟁의 분위기 속 일반인들의 삶 혹은 각국의 체제가 변동하던 시기의 일반인들의 삶과 사뭇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중 내용을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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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것은, 혹은 삶이라는 것은 생의 다양한 굴곡진 경험들로 점칠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주민들 서로서로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책을 덮은 이후에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세상에 대한, 삶에 대한, 인생에 대한 고민들로 사색적일 때 찾아 헤매던 답을 한 권의 책으로 무심한 듯 툭, '그냥... 이런 게 삶이고 인생이고 세상이야...' 하며 인생을 충분히 살아본 현인이 절실히 답을 원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일러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기도 했다. 여기에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님의 봄기운에 생생하게 올라오는 푸른 생명들의 몸짓처럼 은은하고 점진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더해져 여운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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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케묵은 먼지를 청소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했건만, 책을 다 읽고 막상 기분이 시원하지 않다.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알아챈 것만 같아 괜스레 차분하고 우울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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