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저, '체호프 희곡선', 1896
최초 작성일 2021.04.12
양가적(兩價的): 두 가지 이상의 가치나 의미를 지닌. 또는 그런 것.
지나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잘것없고 어리석은 일들이 이따금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언제나처럼 그런 것들을 비웃으며 하찮다고 여기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일에 매달리고, 또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멈출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걸 느끼는 거야. - 세 자매 中 투젠바흐 남작
익숙한 쇳가루와 오일 향을 잔뜩 머금은 구름을 내뿜는 차들 속 전기차의 등장은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낯설게 다가왔던 적이 있다. 늘 그렇듯 새로운 것은 부담스럽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다. 이 증상은 나이가 듦에 따라 더욱더 가속화되며 점점 익숙한 것만을 찾게 만든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한 뒤 볼 수 있는 저 너머에는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때로는 별 것 아니었다고 느낄지라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것은 어렵게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는 한마디. '시작이 반이다.' 오늘도 새로운 것,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스스로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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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이하 줄여서 체호프)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대문호라고 불리는 소설가 혹은 극작가다. 그에 대한 설명은 갓무위키로 대체한다. 일련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시나리오 혹은 연극의 대본이 되는 글을 직접적으로 읽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조심스러웠지만 러시아의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들에 적응하다 보니 하나의 메시지가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전혀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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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극소설은 대체로 몰락한 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읽다 보면-특히 반페이지 남짓의 긴 대사들-러시아의 시대상을 매우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치 '토지'의 김영옥 작가님,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님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비슷한 부류의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극소설이라는 낯선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였다. 어느새 낯섦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책의 이해를 돕고자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을 검색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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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재미난 것은 첫 번째 극인 '갈매기'에서는 작중 인물인 소설가 트리고린이 소설가의 삶에 대해 푸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체호프 본인 삶의 현재를 이야기하듯 생생하게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으레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글 속에 본인의 이념, 감정, 가치관 등을 담아내기-담아내려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다-마련이지만, 정말 현실의 소설가가 소설 속 소설가를 등장시켜 그 속마음을 표현해 내다니... 극소설에 초현실성을 더해 내용이 조금 더 극적인 표현처럼 느껴져 하나의 재미 요소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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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의 가치 혹은 성질들이 있는 것을 '양가적이다' 혹은 '양면적이다'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양가적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현실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좌익과 우익과 같이 서로 반대되는 가치 혹은 이념들의 존재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상황들이-우리가 어느 한편에 속한 것과 관계없이 두 가지의 상태가 모두 존재하게 되는 것이-실은 현실을 표현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일 양가적 상황에 부딪혀 어찌할 바 모르겠지만서도,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당신은 오늘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양가적인 상황 즉,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았던가? 체호프는 이것을 책에 Yes OR No의 상황에서 어느 곳도 선택할 수 없는-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사연 깊은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인물들로 하여금 내용에 현실성을 주어 극적인 효과와 더불어 독자들의 적극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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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한 편의 고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독서에 마무리라는 표현이-일단락되었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그다지 어울리진 않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조금의 성취감을 얻기 위한 나만의 마무리인 셈이다. 수많은 소설 장르 중에서도 특히 추리소설이나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던-그나마도 최근에는 사회학, 경제학에 미쳐 지냈던-이과생에게 주어진 새로운 장르인 극소설은 세상에 전기차가 처음 등장할 때의 감동 그 이상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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