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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비 온 뒤 갬(황톳길 계단 In 서산 봉화산)

by 세자책봉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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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03. 폭풍 같던 장맛비가 그치고 잠시 가벼워진 공기가 불어오던 주말의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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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책봉씨 우리 이번 행사 기념품으로 절대 수건하고 우산은 사면 안돼요 알겠죠?
-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이 내게 단단하게 이른 지 이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 부서 직원들은 너도나도 우산을 찾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건만,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우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둥이 몇 차례 치더니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몰려왔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잠시 빗방울이 창문과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됐다. 장맛비다. 여기저기 퇴근길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힌 채 서로 만든 동그란 소음만이 건물 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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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와 함께 무탈한 일주일이 흘렀다. 기상청에서는 아직 장마가 끝난 건 아니라고 했다. 싸이의 흠뻑쇼 콘서트의 지역유치가 어려울 정도로 물이 부족했던 요즘인데, 앞으로 비가 더 온다니 참으로 다행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사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내리는데 주식은 왜 오르지 않는 것인지. 아쉬움을 뒤로, 일요일 늦은 오후 잠시나마 맑아진 날씨에 가볍게 짐을 꾸렸다. 아직까지 등산 가서 펼쳐본 적은 없지만, 없으면 섭섭한 책 한 권과 500미리 물 한 병을 챙겼다. 물은 역시 노브랜드다. 삼다수는 사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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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일주일에 2~3회 올라가는 뒷산이지만, 이번 주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한 탓인지 떨어지는 발걸음이 괜스레 설레었다. 비 온 뒤 맑은 날씨엔 습기가 짙어 공기가 무겁기 마련인데, 어째서인지 공기조차 가벼운 느낌이다. 오늘도 역시 옥녀봉을 경유해 봉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다. 비가 많이 온 탓에 등산로의 상태가 걱정스러웠지만, 단단한 돌계단과 깔려있는 야자매트를 보니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폭우나 폭설에도 이곳 등산로는 언제든 나를 맞이해줄 수 있을 것처럼 든든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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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03. 그렇게 비가 몰아쳤어도 튼튼한 야자매트와 멀쩡한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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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해발고도 197m의 작은 산이다.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매운 법(?). 보통 대형 산맥의 언덕이나 골짜기의 가파른 경사길을 칭하는 깔딱 고개가 이곳에도 있다는 사실은 이곳을 자꾸 찾게 만드는 매력포인트가 분명하다. 오늘도 역시나 지금까지 수십 번을 올라갔음에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매운맛의 언덕을 마주했다. 언덕을 올라가기에 앞서 벌써 햄스트링이 저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지체할 수는 없는 법. 한걸음, 두 걸음. 발끝으로 걷다가 발목으로 걷다가. 종아리로, 무릎으로 결국 엉덩이로.

등산은 엉덩이로 가는 거야, 엉덩이에 힘을 주라고! - 김종국 In 미운 우리 새끼


엉덩이 근육이 나를 이끌었다. 엉덩이는 강력했다. 엉덩이 근육을 타고 올라간 느낌이랄까. 금세 고개 끝자락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허벅다리의 고통이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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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 고개를 지나면 사실상 하산하는 수순이다. 봉화산 정상까지는 조금 더 남았지만, 남은 길은 평지 능선을 타는 정도의 쉬운 길이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능선에 접어드니 장맛비로 젖어있을 등산길에 아무도 없을 것 같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때로는 연인이,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홀로, 활짝 핀 날씨를 즐기려는 많은 이들이 나를 지나쳤다. 봉화산 정상에 도착해 숨을 돌릴 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푸른색과 회색의 오묘한 조화가, 그러나 푸른색이 더 돋보이는 장마철의 비 온 뒤 맑은 하늘빛이었다. 거대한 자연이 홀로 등산길에 오른 나의 고독함을 감싸주는 듯했다. 등산은 정말 즐겁다. 가방에서 브랜드가 없지만 브랜드가 있는 노브랜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남은 건 하산이다. 하지만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려면 하산할 때 절대로 무릎으로 내려오면 안 된다. 한걸음 한걸음. 스쿼트 자세를 항시 유지하며 엉덩이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골은 소중하니까요. 찬양하라 GYM종국!(헬창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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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03. 점점 계단이 만들어지고 있는 황톳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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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정상에서 내려와 서광사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면 야자매트 옆으로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된 황톳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황톳길은 빗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얼마 전까지 비가 오지 않아 쩍쩍 갈라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산 위쪽에서 흘러내린 물을 한껏 머금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신고 있는 러닝화가 이런 황톳길에 닿으면 심각하게 더러워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레 야자매트 위를 벗어나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보니 무언가 재미난 것이 보였다.
어릴 적 문방구에 팔던 찰흙처럼 되어버린 황톳길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황톳길이 점점 계단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누구도 이곳에 의도적으로 계단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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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시작된 한 걸음의 발자취를 따라 지나가는 이들의 한 걸음이 모여 계단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흔적을 좇아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 사회이며,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사슬 최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만약 앞선 이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있다면, 그는 본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야생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윗 세대가 남겨놓은 세계에 한 걸음 더해, 조금 더 진보된 형태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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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등산을 마치고 서광사를 지나 서산 시내로 걸어가는 길. 적당하게 흐르는 땀이 오늘 등산의 성취감을 더욱 고양했다. 한편,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쫓을만한 흔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내가 비루한 존재일지라도,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유가 이렇지 않을까. 그리고 내 존재의 이유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이렇지 않을까.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흘러가고, 시대는 발전하고, 누군가 쌓아놓은 토대 위에 하나씩 얹음으로써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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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마친다. 끝.

▶김종국 엉덩이 참조: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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