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만든 사회(시스템)에서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겠지만 쉴 곳을 찾기 힘들 것이고,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면 언제든지 쉴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자유는 제한되기 마련이다.
틀이 싫고 틀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틀은 존재에 대한 의문 대상일 수도 있으나,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삶에 만족 또는 불만족을 느끼는 것은 이것을 사회라는 틀을 어떤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냐에 달려있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들이기에, 누구에게도 특별한 잘못은 없다.
아니, 애초에 잘못을 정의할 수 있는지부터가 난센스에 가깝다.
다만 나의 행동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의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 일을 한 것이고. 양아치는 양아치일을 한 것이고. 공무원은 공무원일을 한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들의 연속이다.
어차피 삶에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실 모든 것은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문제다 싶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고, 문제가 아니다 싶으면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두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캐릭터에 심취한 연기자들이 펼치는 사회적 역할극.
어쩌다 보니, 아돌프 아이히만의 논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완전하게 틀린 말도 아니니까.
물론, 이런 철학적 논리가 생명윤리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시민 작가가 이야기했듯, 윤리에 대한 논의 혹은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도덕적 윤리의 수준이 도대체 어떻게 구분되어 있길래 무엇보다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보다 아래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것들은 감히 인간의 삶에서 쉽게 정할 수가 없는 영역이다.
그러니 인간은 집단생활의 규율을 만들기 위해 과거부터 종교라는 거대한 정신 세뇌 장치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생명은 대부분의 경우 반드시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또 반드시 소중할 이유는 뭐람. 어차피 모두 우주로 흩어질 터인데.
그냥 그렇다고, 혹은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으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 또한 그다지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를 교육하는 강사는 우리를 향해 무어라 열심히 지껄이고 있다.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다만 금일의 교육 내용에 대해 약간은 비아냥 조로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꼴이 살짝 역겹긴 하다.
오늘 모인 교육의 주제가 결코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떠한 것에 가벼이 여길 필요도, 그렇다고 또 심각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수습을 할 거야. 과거로 되돌아갈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사건이 벌어진 뒤에 이야기하는 것들은 사실 많은 경우에서 쓰레기다.
진실은 존재하고,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이유와 동기는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
명분이 없는 말에 힘이 없어지는 것처럼 사실관계에도 힘이 빠진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육은 사후약방문과 같다.
그러나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다시 키울 소는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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