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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잠깐만, 중간 점검!

by 세자책봉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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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09 ~ 2022. 07. 24. 부춘산에서 바라본 서산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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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출근 준비로, 출근 후 업무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으로, 점심을 먹고 나면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 남짓. 오후 업무를 시작하고 3시에는 잠시 휴식시간을. 잠시 후 울리는 아랫배의 알람. 6시 땡. 퇴근합시다. 벌써 퇴근시간이라고? 좋긴 한데,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벌써 6시야? 으악. 시간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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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이곳에 온 지도 6개월이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새로운 곳에 적응한다고 멘탈이 흔들렸던 시간을 생각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뭐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지나간 시간에 남아 있는 허무다. 이것저것 달라지고 새로 한건 많은 것 같은데, 정작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늘, 목요일부터 시작된 천안-서울-대구 3일간의 출장 일정 끝에 잠시 멈춰서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고, 무엇이 바뀌었는가에 대해 지난 6개월의 시간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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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것

① 줄어든 말 수
② 눈치 보는 일이 잦아지며 늘어난 거짓말(본사 생활)
③ 완전히 새로운 업무(사업 관리)
④ 뒤바뀐 사내 문화
⑤ 많아진 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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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뜯어보자. 첫째, 줄어든 말 수. 말 수가 왜 줄어들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화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전에 있던 부서와 달리 이곳에는 상당 수의 인원이 나보다 높은 직급을 갖고 있다. 덕분에 나는 말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나와 같은 직급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몇 명 되지 않아 업무 시간에 대화를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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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눈치 보는 일이 잦아지며 늘어난 거짓말. 첫째와 일맥상통하는 변화다. 기존 부서에서는 같은 직급의 인원이 훨씬 많았고, 크게 눈치 볼 일 없이 업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불가능했다. 본사라는 특성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독 꼰대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에게 눈치를 강요했다.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라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 크게 놀랄 일은 없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달랐다. 그렇게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도 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거짓말을 원하고 있으니, 응당 그에 따르게 된 것이다. 어르신들이 원하는데 그 어떤 거짓말을 못하리? 그러나 거짓말은 거짓말. 내가 그들에게 뱉은 거짓말에 따를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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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듣길 원해요? 그러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러나 내가 거짓말처럼 행동하길 원하지 말아요. 나는 내가 갈 길을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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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완전히 새로운 업무. 기존에 했던 업무와 달리 현재는 특정 사업의 전반적인 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단순하게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다행히 새로운 업무에는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 편이다. 실제 어떤 문제가 있었음에도 기간 내에 잘 해결해서 사업이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모습에는 약간의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새로운 업무가 어떻냐는 주변인의 물음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에는 기업 대 기업으로 일을 했으면, 지금도 기업 대 기업의 일을 하지만 규모가 훨씬 커졌고, 이에 더해 인·허가 업무도 하다 보니 국가를 상대로도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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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뒤바뀐 사내 문화. 같은 회사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이곳의 사내 문화는 전에 있던 곳과는 많이 달랐다. 단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제시간에 퇴근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자신보다 윗 직급의 사람이 먼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말로만 듣던 수직적인 문화다. 휴가 사용 제한, 주말 골프 미팅, 저녁 식사 예약 등 수직 문화를 대표하는 많은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중 최고의 백미는 이곳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스스로들, 알아서 윗 직급의 사람에 기어 다닌다는 것이었다. 표현이 조금 과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그들의 은근한 압박 속에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을 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하고 있는 당신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내 눈엔 기어 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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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많아진 술자리. 수직 문화의 최정점. 이곳에 온 이후 내게 가장 큰 변화는 술자리가 엄청 잦아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업무적으로 말이다. 최소 일주일에 하루 이상, 퇴근 시간이 한 시간 남았을 무렵이 되면 내게 비슷한 물음이 날아온다. “저녁에 회식할 건데 xx대리도 올래?” 그뿐만이 아니다. 사업 관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이유로 일주일에 많게는 세 번 이상의 술자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나는 필수적인 참석 자리가 아니면 대부분 거절한다. 그래서 나의 평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도 고맙다. 나의 의사를 물어는 봐주니까. 내가 먹기 싫다고 하면 안 먹어도 되니까. 그러나 사회생활하면서 매일 안 먹기도 쉽지 않다. 여기서 더 거절하다가는 나를 다른 곳으로 발령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오히려 이렇게 술을 많이 먹는 곳이라면,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맞다고 본다. 가장 싫은 건 이런 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술을 마시느냐다. 저녁 먹고 떠들고 친목을 다지는 건 좋다. 그런데 왜 굳이 술을 먹냐는 거다. 콜라 한잔, 커피 한잔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말이다. 그래 놓고 술 안 마신다고 하면 말도 안 걸고, 은근히 배제시키는 당신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들은 이미 술에 중독되어 있다고. 치료를 받아야 될 수준이라고. 그리고 나를 배제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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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술을 싫어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반주로 가볍게 한잔 마시는 것도 좋고, 좋은 사람들과 흥에 취해 한껏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업무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하다면 자리를 하는 편이다. 다만,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다른 일정으로 마시기 곤란한데도 불구하고 마시자고 하는 당신들을 싫어할 뿐이다. 나는 강압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술자리가 싫다. 몸에 좋지도 않은 건데, 자유롭게 좀 먹읍시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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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개월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비록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을 했지만, 이곳에 오고 3개월 동안은 위의 변화 덕에 아주 지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냥 나쁜 점만 있던 것은 아니다. 덕분에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지만, 인생에 대해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업무 능력이 출중한 사람도 있었고, 멘토로 삼을 만큼 훌륭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더불어 사회의 현실 또는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이제 확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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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곳으로 이동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으로 이동한다고 얘기했을 때 주변 동료들은 모두 나를 말렸다.

지금껏 고생했는데 굳이 그런 곳에 가지 말고 이왕 이동하는 거 편한 곳으로 가세요.

 

이미 이곳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이동하길 원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남들이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곳의 업무 자체는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개인적으로 품은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곳의 문화가 그들이 얘기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겠지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처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방향성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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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는 역시인가. 막상 이곳에 와보니 희망은 개뿔. 얼마 못가 나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곧 나의 미래가 될 저들의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그들은 전적으로 나와 다른 결을 지녔고, 나는 그들의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무것도 비출 수 없는 깨진 유리조각이 되어버린 마음을 추스리기를 여러 번, 그리고 확신했다. 이곳에 내가 생각하는 희망은 원래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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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아직 이른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확신에 찬 판단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좋다.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대해 갖고 있던 희망은 여전했을 것이고 남들의 판단에 의존한 채 심지어 이곳을 동경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지금 6개월의 경험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게 축복과 다름없다.

What's happened is happened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닐(테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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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마친다.  끝.

 

▶테넷 사진 참조: 유튜브 리뷰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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