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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행

버거를 먹기 위해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서해랑길 68번 코스(1)

by 세자책봉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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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8. 21. 파도리 입구, 방조제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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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그늘막이 되어주던 나무의 이파리가 하나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푸르른 벗들이 많건만 어찌하여 이른 생을 마감하는가. 가을이 벌써 이만치 다가옴을 느꼈다. 오전 5시 30분. 고요히 가라앉은 옅은 새벽안개가 호수 공원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려는 안개의 무게감이 오늘 날씨를 일러주고 있었다. 시골 출신인 아버지는 내게 어렸을 적 주변 환경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를테면, 지난밤 구름의 형태로 말미암아 다음날 비가 내릴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 덕에 나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대략적인 날씨의 흐름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창 밖을 내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안개가 낀 걸 보니 오늘은 적어도 지난번 트래킹 때보다는 날씨가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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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를 따라 이어지는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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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계획한 트래킹 코스는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에서 시작하여 만리포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서해랑길 68번 코스였다. 총 23km 7시간 코스로, 서해랑길 65번 코스보다 5km 이상 길고 난도가 높은 길이었다. 즉흥적으로 출발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사용을 위해 말려놨던 우비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조금 서둘러야 했다. 태안터미널에 6시까지 도착해야 송현리를 지나는 첫 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오전 6시 30분. 송현1리 정류장에서 내려 코스의 입구로 향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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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아침 시골길의 단잠을 깨우는 것은 닭의 울음소리도, 개가 짖는 소리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땅을 향해 움직이는 누군가의 우렁찬 경운기 엔진 소리였다. 탈탈 탈탈. 주변이 얼마나 조용한지, 들리는 소음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한바탕 기계음이 지나가자 다시금 세상은 조용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시골집을 지키는 강아지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코스의 초반은 민가와 바로 인접한 길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어’. 강아지에게 손을 흔들며 큰 목소리로 대답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인사가 아니라 빨리 가라는 신호였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처음 보는 낯선 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당장 가방에서 먹을거리라도 꺼내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평화로웠던 마을의 행적에 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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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들지 않아 걷기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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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10분. 송현리와 파도리를 잇는 방조제에 들어섰다. 깜짝 놀랐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있듯 방조제를 지키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레 겁을 먹었지만 엎드린 채 잠을 청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아까와 같이 인사를 건넸다. ‘여어’. 덩치 큰 친구는 무거운 눈을 간신히 뜨고는 게슴츠레 나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소통이 된 듯했다. 검열 없이 성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좌측으로는 남쪽의 신진도리와 북쪽의 파도리 사이로 형성된 만의 형태를 띤 서해바다가, 오른쪽으로는 짙은 녹색으로 가득 찬 논밭이 평지를 이루고 있었다. 방조제는 일차 선도 정도의 크기보다 컸고 주변 정비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걸어가는 길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구름에 가리길 반복하는 햇빛으로 인해 발아래 그림자가 생사를 자주 오갈 즈음 파도리 입구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전에 파도리는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여행지를 전체적으로 훑어볼새 없이 특정 스팟만 스리슬쩍 오갔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때, 오늘 다시 알아보면 되지.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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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걷기 시작한 이유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나의 행위로 이루어진 경험들은 내게 들러붙지 않았고 욕조에 물 빠지듯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점차 그 기간이 길어지자 내게는 더 이상 빠져나갈 것도, 기억에 남는 무언가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윽고 공허함이 밀려왔다. 공허함은 내게 그동안의 행위에 많은 의구심을 들게 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 사이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결국 그것은 내게 그동안의 행위에 그 어떤 진정성도 없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행동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그저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내면의 진정성을 찾고, 주체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잔상을 최대한 구체화시킬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지금 걷고,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 공허함의 고통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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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이 서있는 갈매기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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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으로 파도리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해안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해안에는 자주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저들도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갈매기들이 부러웠다. 시골의 최고 교통수단인 시티백 한 대가 지나갔다. 정신이 돌아왔다. 아니 저들은 지금 배가 고파서 먹을걸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조금 더 걸어가 보니 새우 양식장으로 보이는 곳에 수차가 시원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태안의 특산품인 대하가 이곳에서 생산될 터, 하여간 갈매기란 놈들은 새우깡도 그렇고 새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출하할 때가 아니라 딱히 얻어먹을 만한 것은 없어 보였지만 명품백을 사기 위해 백화점 앞에 줄을 서듯, 가을이 다가오자 갈매기들도 은근한 위치 선정을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전신주 단자함을 열어 무언가를 정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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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서쪽 땅끝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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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0분. 마침내 서해 땅끝 아치내캠핑장에 도착했다. 전남 해남이 남쪽의 끝으로 불리듯 육지에서 만큼은 이곳이 서쪽의 끝이다(섬까지 합치면, 우리나라 동쪽의 끝은 독도, 남쪽의 끝은 마라도, 서쪽의 끝은 격렬비열도). 캠핑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방금 도착했는지 텐트를 치고 있었고, 반대로 텐트를 철거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밌는 건 누군가 아침식사인지 해장인지 알 수 없지만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인원수만큼 끓이고 있었는데, 테이블에 있는 캠핑객들의 몰골을 보아하니 지난밤 얼마나 열정적으로 놀았는지 알 것도 같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길은 파도리의 서쪽, 그러니까 서해바다의 해안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만 남았다. 중간에 한 번 길을 잃어 본래 길보다 조금 높은 산길을 지났는데, 거미줄이 많아 힘들었지만 가려진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의외의 재미 포인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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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소방도로 같은 산길이 이어졌다. 생각보다 가파른 구간도 있었고 여름날 길게 자라난 풀이 길을 막고 있는 곳도 있다 보니, 지난번 코스보다 왜 난도가 높다고 했는지 한 방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산에서 튀어나와 나보다 앞서 길을 따라 걸었다. 한동안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녀석은 어슬렁어슬렁 걸었고 나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내리막이 나올 즈음 녀석과의 거리는 불과 2m 남짓! 이렇게 둔감한 녀석은 오랜만이라 기척을 죽이며 뒤꽁무니를 쫓는 게 왜 이리도 즐겁던지. 적당히 재미를 본 뒤 발걸음 소리를 내며 눈치를 주자 녀석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장 산으로 도망쳤다. 오래 살아라 이놈아, 눈치만큼 생존에 중요한 것도 없다. 삼색이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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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의외의 장소, 소방도로, 파도리 인생버거, 새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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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파도리 해수욕장에 도착한 건 오전 9시 50분 남짓이다. 두루누비 앱을 켜고 걷다 보니 중간 스팟에 도착하자 자동으로 알림음이 울렸다. 이내 오래된 구식 펜션과 민박, 서해바다의 전망 따라 왜인지 카페가 들어설 것 같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새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가자 꽤나 익숙한 장소가 나왔다. 파도리에서 가장 유명한 버거집과 카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침 버거집 앞에 두 명이 줄을 서 있지 않은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 문질렀다. 그랬다. 오픈 시간이 불과 10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태안 근처에 산지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평일에는 업무에 치이고 주말에는 관광객에 치이다 보니 구경만 해봤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던 곳이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버거를 맛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윽. 먼저 온 두 명 뒤에 몸을 세웠다.

 

2편에서 계속...

 

버거를 먹기 위해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서해랑길 68번 코스 (2)

주말마다 비가와서 급발진으로 다녀온 트래킹 - 서해랑길 65번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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