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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행

주말마다 비가 와서 급발진으로 다녀온 트래킹 - 서해랑길 65번 코스

by 세자책봉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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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31. 서해랑길 65번 코스 완주 후 - 태안 안면도 몽산포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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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창가에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방안을 맴돌았다. 하늘도 원망스럽지. 어떻게 황금 같은 일요일에 비를 내려주시는가!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한 두 달 동안은 거의 매주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5일간의 노동 끝에 주어지는 이틀 간의 달달한 휴식 이건만. 오늘도 야외활동을 못한다는 생각에 온 몸이 찌뿌듯했다. 창가 책상에 앉아 물 한잔을 마시며 하늘을 원망했다. 하, 어디론가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시간 유일한 시간인데 그저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비는 점점 거세게 내렸다. 태풍이 두 개나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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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리는 비도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덥고 습한 여름이잖아 그래! 차라리 비를 맞으면서 걸어 다니면 땀도 덜 나고 시원하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논리는 완벽했다. 빠르게 짐을 꾸렸다. 어차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니 갈아입을 옷은 빼고, 500ml 물 한 병과 수건 한 장을 군용 천막으로 만든 가방에 넣었다. 이미 재질부터 비가 와도 끄떡없는 재질이다. 옷 역시 비를 맞아도 금세 마를 수 있도록 최대한 가벼운 것으로 입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싶어 우비 한 장을 집 앞 편의점에서 구매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다.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현재 시각은 1시 40분. 버스의 목적지, 그러니까 트래킹 코스의 출발지인 당암포구로 향하는 버스는 2시에 있었다. 채비를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오후 이 시간에?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급발진도 이런 급발진이 없다. 어느덧 저 멀리 버스가 보였다. “그래 뭐 있나, 그냥 가는 거지 뭐!”

군복 아닙니다. 예비군 졸업 얼마 안 남았습니다. 군인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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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40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당암포구에 가기 전에 위치한 창리 교차로다. 이곳에서 안면도 방향으로 창리교를 지나가면 당암포구가 나오는데 서해랑길 65번 코스의 시작점은 창리교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내리는 비를 뚫으며 창리교를 걸었다. 왼쪽으로는 차도를 건너 서해바다가, 오른쪽으로는 부남호가 보였다.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고 진작 나올걸!” 비가 내리는 터라 가는 길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목소리 크게 노래도 부르고 팔도 마음껏 휘저었다. 자유로웠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갈 수는 없는 법. 그렇게 하다간 분명 달리는 차에 치인 고라니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싶어 친한 친구들에게 갑자기 연락이 안 되면 걷다가 차에 치인 거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빨리 치이라는 친구들의 답변이 왔다. 이 쉑···. 다행히도 가는 길 중간중간 화살표 스티커와 매듭이 서해랑길을 걷는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들을 따라가면 됩니다. 이정표, 스티커,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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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암포구 오거리에서는 길을 헤맸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5초의 고민도 안 한 것 같다. 못 먹어도 고! 직진이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어휴, 그 시간에 핸드폰 화면을 몇 번 문질러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 될 것을. 결국 차도로 5분 이상 걷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다시 한번 지도를 확인했다. 직진이 아니고 걷는 방향 기준으로 서북쪽 방향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달리던 차들은 분명 나를 인간 고라니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재빨리 오거리로 돌아와 제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 멀리 나뭇가지에 매달린 매듭이 보였다. 얼마 전 시력검사에서 분명 좌우 1.5 1.5가 나왔는데···. 자라난 풀 사이로 감춰진 화살표 스티커도 보였다. 이 세상에 완전히 친절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뒤로 이제는 선로 위에 안착한 기차가 된 듯 제대로 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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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온통 녹색으로 가득했다. 무성한 나뭇잎과 풀들, 양옆으로 펼쳐진 넓은 논에 줄 세워져 자라고 있는 짙은 녹색의 벼는 한동안 나의 벗이 되어 주었다. 서른 살을 지나고 있는 나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은 분명 서로 닮아 있었다. 지금 곧게 뻗은 그들의 모습은 앞으로 점차 고개를 숙일 것이고, 누군가를 위해 결실을 맺어 줄 것이다. 나의 계절 또한 여름을 지나고 있다. 최고의 성장기인 지금의 시기를 지나 언젠가 그 기운이 점차 줄어들고 가을에 접어들면 몸을 구부리게 될 터.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이 부분이다. 과연 내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자연의 순리대로 따가운 햇빛과 더운 바람을 맞다 보면 계절이 변하고 결과는 제 스스로 따라올 지니.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정진하라! 그러면 결과는 따라올 것이다. 오늘도 자연에게 한 수 배웠다. 비가 점점 그치고 있었다.

푸른 여름의 무성한 녹색지대를 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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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벗들과의 대화는 청포대 해수욕장 근처에 와서야 끝이 났다. 얼마 전에 구매한 트래킹화에는 점점 흙이 아닌 모래알이 밟히기 시작했다. 겨우 두 번째 사용하는데 비를 이렇게나 맞고 다닌다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무릇 모든 것은 쓸모가 있을 때 가치를 발하는 것이니, “그래 그렇게 아끼면서 다닐 거면 비싼 걸 무엇하러 사냐” 약간은 다른 의미인 무소유의 심정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제 길 옆으로는 해송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비록 바닷바람과 맞서 싸우다 바닥으로 떨어져 더 이상 나무로써, 바람막이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이내 자연으로 돌아가 다음 생명을 위한 땅의 양분이 되려는 숭고한 희생이었다. 참으로 초연한 모습이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쓸쓸함을 더했다.

주욱 늘어선 해송들 아래로 떨어져 있는 수많은 나뭇가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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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해변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비는 완전히 그쳤고 더운 습기만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청포대 해수욕장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재정비를 했다. 12km를 걸어오면서 이미 다 마셔버린 물 한 병을 새로 구매하고, 발가락 테이핑을 다시 했다. 다행히 아직 발은 멀쩡했다. 역시 신발이 좋은 탓이다. 오 분간의 달콤한 휴식 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는 오후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몽산포 해수욕장까지 남은 거리는 4km.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지만 트래킹 막바지의 날 선 피곤함이 몸을 채우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 고요한 청산포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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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길 중간중간에는 캠핑을 즐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설치해놓은 텐트를 비롯해 꺼내놓은 장비들을 보니 다들 한 캠핑하는 솜씨였다. 늦은 오후의 휴식을 여유로이 즐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뗬다. 때로는 아이들과, 때로는 연인과, 때로는 반려동물과. 얼마나 평온한 오후인지, 비 온다고 집 안에 박혀 있었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즐거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캠핑장을 지나는 시간이 저녁시간이 아니던가. 여기저기 풍겨오는 저녁식사 냄새가 정말 압권이었다. 특히 삼겹살 냄새는 정말…. 이곳에 스파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 나를 홀려 길에서 이탈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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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10분. 드디어 몽산포 해변에 도착했다. 코스 완주를 축하하듯 점점 맑아지는 회색 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빛이 서해바다를 반짝 비추고 있었다.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완주를 만끽했다. 비록 온몸은 비와 땀으로 젖고, 새로 산 신발은 중고가 되었지만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은 트래킹이었다. 15.3km를 걷는 동안은 오로지 나를 마주 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나의 내면에서는 그간 얽매여 있던 감정들이 풀어지고 다시 매듭지어지길 반복하며 인생의 항로에 요동치던 거대한 파도가 잠시나마 고요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과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은 요즘, 오늘의 트래킹으로 얻은 분명한 한 가지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자신의 위치에서 정진하면 결과는 따라올 것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제 집에 갈 일만 남았다. 버스로 출발했으니, 버스로 돌아갈 차례다. 서해랑길 65코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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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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