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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필요해진 호감능력, 이토 마사아키 <플레이밍 사회>

by 세자책봉 2023.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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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슬컬처와 해시태그 운동, 그리고 플레이밍 사회현상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해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그에 반해 '동감'이나 '호감'은 타인의 의견이나 인상에 대한 평가에 근거해 어디까지나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타인의 감정으로 들어가는, '어느 정도까지 그와 같은 인물이 된다'라고 하는 상상력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 이토 마사아키(저자)

'활활 타오른다'는 의미로 비난, 비방 등의 글이 빠르게 올라오는 현상
'플레이밍'은 더 이상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누가, 왜 논란에 불을 붙이고 화재를 일으키는가

<플레이밍 사회>

2023. 08. 02. 지구는 지구대로 핫(Hot)하고, 디지털 세계는 디지털 세계대로 핫하고!


차례

1장. 자숙 경찰과 신자유주의

2장. 소셜 미디어의 논리와 신자유주의 정신

3장. 해시태그 운동의 명과 암

4장. 차별과 반차별과 반반차별

5장. 악성 게시물과 공감시장주의

6장. 캔슬 컬처의 논리와 모순


 저자 소개

작가 이토 마사아키

1961년생. 도쿄외국어대학교 외국어학부 졸업. 도쿄대학교 대학원 학제정보학부 박사 과정 수료. 일본 IBM, 소프트뱅크에서 근무했다. 아이치슈쿠도쿠대학교 현대사회학부 조교수 등을 거쳐 2015년부터 세이케이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미디어론이다. 저서로 <플래시 몹>, <데모의 미디어론>, <넷우익의 역사 사회학>이 있다. 공저로 <인터넷이 낳은 문화>, <기묘한 내셔널리즘의 시대> 등이 있다.

 

 

 


연일 주호민 작가를 향한 뜨거운 여론과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기서 굳이 해당내용을 확인할 필요는 없겠다. 어차피 이미 그를 향한 총질은 더 이상 사실관계와 무관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지금 인터넷 세상 속 거대한 아고라의 한가운데에 옴짝달싹 못하게 묶인 채 아마 절대다수의 의견은 곧 그것이 정의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주요 여론이라고 불리는 상위 포식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다. 비록 그가 사실관계가 담긴 여러 장의 사과문을 발표했음에도, 한 번 여론이 등을 돌린 이상 그가 하는 말들은 그것의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모닥불에게 마른 장작을 넣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아무래도 당분간 세상에 노출을 꺼리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상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MC인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비롯하여 각종 유튜브 채널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던 그가 날개를 잃어버린 이카루스처럼 한 순간 방향을 바꾸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왜 그는 이토록 갑작스럽게 대중의 표적이 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그가 호감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지난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의식의 산물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것이 개인이 속한 군대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여하튼 집단이라는 것은 결코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했다. 비로소 한 개인에게는 개인이 집단보다 우선순위라고 하는 개인주의가 본격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흘렀고, 개인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국가라고 불리는 같은 국경선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와중에 개인생활이 공동체 생활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잠시나마 오늘날 집단주의 체제의 유일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가파른 성장이 여전히 집단생활이 개인을 중시하는 것보다 더 우수한 시스템임을 보여주는 듯하기도 했지만, 잠자코 있던 미국이 몇 차례 손짓을 하자 그것은 겨우 허울뿐인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음이 금세 드러났다.


개인생활이 중요해진 인류에게 필요 없어진 능력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공감능력일 것이다. 개인주의의 발전 방향과 맞물려 볼 때 공감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타인을 향한 시선, 그러니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의 폭넓은 감정소모가 동반되는 일이었는데 더 이상 타인에 대한 이해나 간섭을 원치 않는 개인주의에서 공감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감정치레 혹은 감정낭비쯤으로 전락해 버렸다. 요즘에 쓰이는 '공감'이라는 표현은 '호감' 또는 '이해'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공감하는 행위의 대부분이 적극적인 감정의 동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두뇌만을 통과한 냉소적 판단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에 비해 인류에게는 타인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애초에 호감능력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필요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흔히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호감은 새로이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에 더해 이제는 호감을 사는 것만으로도 인류는 충분히 먹고살만한 정도의 사회적·경제적 수준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호감의 정도가 SNS 게시글 아래에 위치한 엄지손가락 모양의 아이콘 옆에 쓰인 숫자로 정량화되기에 이르렀으니, 호감능력이 공감능력에 우선하게 된 건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류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개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공감을 유도하는 것보다 호감을 사는 편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그래서 오히려 이 같은 사회에서 호감을 잃는 것이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일이 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원래도 어느 정도 호감이 필요했던 개인에게는 견뎌야 할 짐이 더욱 많아진 셈이다. 

 

그런데 아무리 주호민 작가가 불특정 다수인 대중에게서 호감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에 필요 이상의 짐을 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대중의 평가잣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한 가정의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난과 더불어 특히 어린아이의 실물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마구잡이식으로 편집되어 유포되고 있다. 연좌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한 행동이 과연 잘못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의 관심은 오로지 도대체 무엇이 대중에게 그토록 과격한 권력을 쥐어줬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그들이 한 개인을 그토록 무참히 심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일상적인 챗(chat) 정도의 씹을 거리가 필요했다면 이미 디지털 세계엔 그렇게 할만한 것들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외부로 알려져서는 곤란한 무언가를 덮기 위한 목적으로 대중의 관심이 쏠린 것도 아닐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대중을 그토록 불타오르게 만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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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이란 '활활 타오른다'는 의미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각종 논란과 비방 등의 글이 빠르게 올라오는 현상을 뜻한다. 보통 심한 욕이나 일방적인 비난 등을 플레이밍이라고 하는데, 한때는 합리적인 의견이 많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일반댓글과 악성댓글을 구분하기 어려워진 주호민 논란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 <플레이밍 사회>의 작가 이토 마사아키에 따르면 플레이밍은 2005년경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도 넘은 비방'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2010년대 스마트폰과 SNS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그 저변이 확대되었고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플레이밍이 오늘날 더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를 충실하게 비추는 사회의 거울'이고, 그렇기에 해당 현상의 배경에는 어떤 사회 구조와 시대 상황이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책 <플레이밍 사회>를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그는 이 사회현상에 대해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여러 가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대중이 플레이밍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디지털 세계 특히,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세계는 엄연히 현실 세계와 구분된다. 그러나 인간이 디지털 세계에 개입하는 한 디지털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규범에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들은 현실사회에서의 사회 규범을 디지털 세계로 대입시키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플레이밍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디지털 세계에 마땅한 규범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그 세계에 규범을 형성한다는 취지의 나름 '좋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인식된다는 점이다.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적당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사회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 그것들은 분명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는 행위가 무조건적인 좋은 일이라는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되면서 그것들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비록 과격한 폭력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플레이밍이 일어난다.

 

그는 플레이밍 현상 중 하나인 '캔슬 컬처'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는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캔슬 컬처'는 유명 인사나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논란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그 인물의 활동을 보이콧하고, 직업을 박탈하려는 캠페인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다. 해당 인물을 사회에서 '캔슬(취소)'해버린다는 의미에서다. 초기 '캔슬 컬처'는 미투운동처럼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권력자의 횡포한 언동을 고발하고 그 특권적 지위를 흔드는데 의미가 있었고, 실제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이것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이제 '캔슬컬처'는 정치적 올바름 등과 같이 당신과 내가 같은 위치에 있는지 없는지 즉, 상호 간에 편을 나누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는 이 현상이 디지털 세계에 역동성을 부여했지만 현실 세계에 권력 배치의 불안정화라는 사태를 초래했다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 말을 인용했다.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이 아니며, 그렇게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버락 오바마(전 미국 대통령)

나는 우리 사회가 경험한 지난날과 달리 승진을 거부하며 관리자가 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의 행동이 십분 공감된다. 플레이밍과 캔슬컬처 문화는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이들의 꿈과 희망을 처참히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대중은 사회적 약자인 젊은이들에게 조차 불특정 다수인 자신들도 완전히 지키기 어려운 수준의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심지어 자신들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심장을 쏠 수 있다는 듯 젊은이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채 말이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하러 자진하여 살갗을 꿰는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 속으로 들어가려 하겠는가. 가혹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은 바로 선택하길 포기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대중은 특히 얼굴이 알려진 공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전 무결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끼리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서로가 살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는 세상. 가장 자유로운 시대임에도 한편으로는 감시가 극도로 강화되어 있어서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고리에 헤엄쳐야만 하는 세상.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비록 이 세상이 여러 단점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가 세계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란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겨우 만든 평화로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 현상의 근본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역사이기에, 이것은 살아남은 인류가 앞으로 풀어가야 하는 숙제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인류의 발전방향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현상이 우리 사회에 침잠할수록 수천만 인류가 땅을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지켜내길 간절히 소망했던 고상한 가치의 기틀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분명히 자유로운 세상인데 무언가 점점 자유를 잃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마땅한 해법을 찾기는 더 어렵다. 나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중학생 시절 'CCTV와 사생활 침해'의 해결방법을 논하는 토론을 준비하면서 느낀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우리는 CCTV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자행되는 마녀사냥식의 거친 문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발생하는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이토 마사아키 작가의 책 <플레이밍 사회>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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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 사회,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 | 이토 마사아키 -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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