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소설 <먼 곳에서>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 에르난 디아스의 두 번째 소설 <트러스트>입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흥미로운 소설책입니다.
내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른 설명이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베벨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소금통을 돌리고 있었다. 그건 내 이야기였다. 저녁을 먹으며 탐정소설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베벨은 내 글에서 그 내용을 읽었다. 그건 '여성적 손길'을 활용해 가정적인 일화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에 따라 내가 밀드레드에게 만들어준 장면 중 하나였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하던 저녁식사에서 그 장면을 본떴다. 그런데 지금 베벨이, 내 얼굴에 대고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아이다 파르텐자(작중인물)
에르난 디아스 장편소설
2022 올해의 책 최다 선정 소설(2023 퓰리처상 수상)
<트러스트>
차례
1. 채권 - 헤럴드 배너
2. 나의 인생 - 앤드루 베벨
3. 회고록을 기억하며 - 아이다 파르텐자
4. 선물 - 밀드레드 베벨
저자 소개
작가 에르난 디아스(Hernan Diaz)
1973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미국으로 가 뉴욕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소설 <먼 곳에서>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첫 작품으로 단숨에 미국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사로얀 국제상, 캐벌 어워드, 뉴 아메리칸 보이스 어워드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트러스트>는 작가의 두 번째 소설로, 1920년대 월 스트리트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둔 부부에 대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소설은 퓰리처상과 커커스상을 수상하고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며, '뉴욕 타임스', '타임',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 TOP 10에 이름을 올린 것을 포함해 서른 개가 넘는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으며, HBO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에르난 디아스는 <파리 리뷰>, <하퍼스>, <애틀랜틱>, <그란타> 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고, 구겐하임 펠로십, 와이팅상 등을 수상했다.
트러스트. Trust. 신뢰. 신용. 믿음. 파스텔톤의 연한 청록색 표지에 보이는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 쓰인 트러스트란 무엇에 대한 트러스트일까? 빌딩이라는 건축물에 관한 믿음일까? 아니면 도심 속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 대한 신뢰? 믿음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2017년 소설 '먼 곳에서'를 발표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작가인 에르난 디아스의 두 번째 소설책 <트러스트>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떠한 트러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되리라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책을 읽어나가며 점점 확신이 된다. 바로 '앤드루 베벨'이라는 성공한 투자자에 대한 트러스트다. 책은 작중 또 다른 인물인 '해럴드 배너'라는 이름의 작가가 쓴 <채권>이라는 책의 내용과 함께 시작한다. <채권>에는 주인공이 되는 한 부부가 등장한다. '밴저민 래스크'와 그의 부인인 '헬렌'이다. 1920년대에 벌어지는 미국 대공황에 과감한 공매도 배팅으로 거대한 부를 얻게 된 밴저민 래스크는 투자세계에서는 가히 신적이면서도 반대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도 불리는 천재 투자자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헬렌'은 남편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남편 주변 뒷바라지 일들, 그러니까 특히 이름이 알려지고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을 갖고 있는 자신의 남편의 행보에 발맞추듯 사회적으로 기부를 한다거나 어려운 예술계에 관심을 쏟는 등 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한다. 금전적인 부는 얻을지 몰라도 사회 전반적인 영향력을 얻기 어려운 남편이 채우지 못하는 측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내 '헬렌'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시절 헬렌의 아버지가 보이던 기이한 행동을 자신이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스위스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치료를 시도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전설적인 투자자 '밴저민 레스크'와 그의 아내 '헬렌'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이어서 책 <트러스트>의 진짜 주인공인 앤드루 베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이름이 알려진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은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투자자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밀드레드'라는 이름을 가졌고 예술, 특히 음악과 꽃에 관심이 많은 아내가 '있었다.' 그는 1920년대 미국 대공황에서 반대매매를 시도해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밀드레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위스 병원에서 말이다. 어라? 무언가 이상하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앞서 소개된 해럴드 배너의 <채권>에 실린 이야기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다. 그렇다. 해럴드 배너는 자신의 소설인 <채권>에 사실 앤드루 베벨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과연 <채권>의 플롯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용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모조리 믿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믿을 수 있는 걸까? 생각의 유희에 잠기게 되는 첫 번째 포인트다. 트러스트. 신뢰. 믿음. 과연 무엇에 대한 믿음일까?
이후의 이야기는 앤드루 베벨이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채용한 그의 비서 '아이다 파르텐자'와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가 자서전을 굳이 남기려는 이유는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놓은 <채권>에 깊은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채권>에 담긴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내용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허풍을 섞어 놓았다며 그것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그는 본인의 야욕을 반드시 채워야만 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비서에게 아파트 한 채쯤은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도 사줄 수 있는 재력을 갖고 있는 그는 심지어 출판사를 인수해 <채권>을 아예 세상에서 지우려고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비서인 '아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벗어날 수는 없는 처지다. 계약서에 서명을 한 순간 그녀의 목숨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일생을 설명할 때 앤드루 베벨은 주로 자신의 수준 높은 성과를 이야기하는데 그친다. 그리고 가끔 그의 아내인 '밀드레드'를 언급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그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예술가를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채권>에 등장하는 '헬렌'처럼 사회적 기부에 관심이 많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앤드루 베벨은 소설 <채권>이 완전히 허풍이라며 싫어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생각의 유희 두 번째 포인트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그의 아내를 몹시 사랑했고, 흠모했다. 그리고 지금은 무척이나 그녀를 그리워한다. 과연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의 아내를 설명할 때 구체적인 것은 설명하지 않는 걸까?
비슷한 의문을 그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아이다'도 느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내 '밀드레드'가 궁금해진다. 또한 그녀를 잘 알아야 글을 쓰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녀가 작가이기에 작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앤드루 베벨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쎄함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아이다는 자서전에 대해 베벨과 이야기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결코 그의 이야기가 아님을 눈치챈다. 왜? 그가 하는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다'가 본인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녹여낸 온전히 '아이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거짓이 진실로 변하는 순간. 생각의 유희 세 번째 포인트다. 사실 병은 아내가 아니라 베벨이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다는 베벨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베벨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일까? 사실 그는 모두 허구일까?
그렇게 아이다는 자서전을 쓰기 위해 다니던 도서관에서 밀드레드가 생전에 남기고 간 기록물에 접근한다. 아이다는 그곳에서 밀드레드가 남긴 노트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만한 것이 등장한다.
인간의 역사는 곧 승리의 역사다. 세상에 남겨진 승리자가 역사를 만든다. 오늘날에는 돈이 많으면 승자가 되고, 돈이 없으면 패자가 된다. 또한 건강하게 오래 살면 승자가 되고 일찍 죽으면 패자가 된다. 단순하면서도 치가 떨릴 정도로 현실을 관통하는 진실이다. 끝내 세상에 남겨질 것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앤드루 베벨이 만들어 낸 그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이다. 이건 그의 자서전이지만 엄밀히 그의 자서전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자서전이다. 진실이 무슨 소용일까?
진실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늘 숙제를 남긴다. 그것이 과연 정말 진실일까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파헤쳐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최고의 지성이자 최대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 진실은 존재하겠지만, 어디선가는 분명히 왜곡될 수 있다는 맹점에 대한 이야기. 진실은 언제까지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 책 <트러스트>의 작가인 에르난 디아스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생각의 유희 마지막 포인트. 우리 주위에 있는, 진실이라고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의문을 가질 필요도 있다는 것. 세상에 남겨진 인간에게 안기는 무거운 메시지다.
그런데, 스위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밀드레드는 도대체 어떻게 본인의 노트를 남길 수 있었던 거지?
어쩌면 작가는 인간이 서로에 대한 믿음(신용)으로 저 뉴욕의 빌딩을 쌓아 올렸듯, 사실 믿음의 실체와 허구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지만 강렬한 소설책이다. 에르난 디아스의 책 <트러스트>를 적극 추천하며 책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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