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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우리 안의 가상인간

by 세자책봉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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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3. 주말 아침 여유로이 마시는 커피한잔과 깨어나는 현실 자각.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워져 갈수록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결혼은 언제 하려고?', '만나는 친구는 있고?'

 

평소에 나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저런 질문밖에 못할까 생각함과 동시에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독침을 집어삼킨 뒤 한마디 뱉는다.

 

'예... 뭐 잘 만나고 있습니다. 때 되면 하려고요'

 

근데 사실 난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만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불편한 대화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위의 상황에서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오르는 불에 마른 장작을 집어넣는 것과 같고, 물고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떡밥을 뿌리는 것과 같다.

 

이는 곧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입에 달린 모터에 연료를 들이부은 꼴이 될 뿐이고, 그 결과 모터를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게 만들 뿐이다.

 

뭔가 어이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들은 하나 같이 비관적이고 나를 훈계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더 심할 경우 상대방에게 내가 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무슨 영양가 없는 짓인가.

 

그래서, 별 관심도 없는 상대방에게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던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나랑 만나고 있는 역할을 해 줄 내 안의 가상인간을 만들기로.


내 안의 가상인간은 그 존재를 매번 드러내지는 않는다. 특히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제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은 보통 저런 질문을 함부로 하지도 않거니와, 질문을 하더라도 나의 있는 그대로의 답변을 존중해주기 때문에 딱히 내 안의 가상인간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그럼 언제 등장하는가?

 

가상인간은 주로 친인척을 비롯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가끔 만나는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 줄여서 어색한 사람들 앞에.

 

친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불편하지도 않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만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으로 오가는 대화의 주제는 한없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상대방에 대한 존중마저 결여되어 있는 상태인 그들은 끝내 그 좁아진 대화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입으로 쓰레기를 뱉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 쓰레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가상인간이 등장할 준비를 한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 샹크스(In 원피스)

 

가슴이 뚫린 채 쓰러진 에이스와 에이스가 죽었다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루피, 그런 그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날리기 위해 달려오는 아카이누. 그리고 끝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등장하는 샹크스처럼 가상인간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내 안의 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힌다.

 

종량제 봉투를 한 손에 든 가상인간은 거대한 파도 앞에 쌓인 모래성처럼 어색한 그들과 나 사이의 아슬아슬한 유대감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 어느새 그들과 나 사이에 들어와 위치한다.

 

강력한 패기를 두른 채 가상인간은 함부로 쓰레기를 뱉은 그들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응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인간의 총기 있는 눈빛은 쓰레기를 뱉어낸 그들의 어리석음에 분노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한다. 가상인간의 몸에선 빛이 뿜어져 나온다. 두 눈 가득 존재의 빛을 머금은 그들은 섬광탄에 맞은 듯 눈을 뜨지 못한다.

 

그렇게 가상인간의 강렬한 존재감은 손쉽게 그들을 압도하고, 인간존중은 개나 줘버린 그들과 나 사이에 오가던 아무 쓸모없는 대화가 더 이상 이루어지는 것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잠시 시공간이 멈춘 것 같은 찰나, 가상인간은 그들이 뱉어낸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주워 담고 사라진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존재감에 압도당한 충격으로 뇌가 정지된 그들과의 대화는 이후 몇 마디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단절된다.

 

어느새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던 유대감마저 '무(無)'로 돌아가버리고,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진정한 '남'이 된다.


문득 가상인간에 대한 짧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최근 내 안의 가상인간을 드러낼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 대화를 나누던 상대방으로부터 상대방 또한 그 사람 내면에 그 사람만의 가상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눈치챘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친한 친구의 역할을 수행할 가상인간을 만들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 시간에 가상인간과 약속을 잡아 놓곤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가 만들어질 것 같은 상황이 오면 가상인간과의 선약을 지키기 위해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가곤 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철벽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애인의 자리를 대신할 가상인간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애인이 꽤나 먼 곳에서 살고 있고, 자신은 아직도 애인을 사랑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연락을 했다는 것 까지 굳이 이야기한다. 그들의 애인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철벽 치는 행동이 본인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 누군가는 여러 가지 주변 상황을 굳이 번잡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가상인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처럼.

 

가상인간의 존재는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가상인간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과 대화 중 상대방 스스로 본인이 만들어낸 가상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에는 그것을 눈치챔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곤 한다.

 

내가 무언가 불편하게 했나? 내가 괜히 곤란한 자리를 만들었나? 내가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을 물어봤나?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고, 누구에게나 불편한 상황이 있고, 누구에게나 말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에게 가상인간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상대방에게는 미안함을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상인간의 존재는 현실에 실존하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가상인간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신뢰가 부족한, 그만큼 힘들고 복잡한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얼마나 자리를 피하고 싶으면, 얼마나 힘들면 가상인간을 만들어 내겠는가.

 

가끔 내 안의 가상인간을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이런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다.

 

그래서 난 누군가가 가상인간의 존재로부터 현실의 삶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직 그 존재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경우에만)

 

언젠가는 우리가 저마다 만들어낸 가상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진심으로, 서로 존중하며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아직은,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가상인간을 품고 산다.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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