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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갈릴레이가 있다면 조선엔 홍대용이 있다, 김아리 편역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by 세자책봉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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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중 한 명인 홍대용의 '담헌서'를 요약한 책입니다. 양도 적당하고 천천히 곱씹으며 읽기 좋은 책으로 추천드립니다.

주나라 이후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王道)'가 날로 쇠퇴하고 무력과 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패도(覇道)'가 횡횡하여, 인(仁)을 가장한 자가 '황제'가 되고, 병력이 강한 자가 '왕'이 되고, 지략을 쓰는 자가 귀하게 되고, 아첨 잘하는 자가 영화롭게 되었소.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에는 총애와 녹봉으로 꾀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는 권모술수로 꾀었소.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뜻이 맞아, 서로 걱정거리를 처리해 주며 아래위가 서로 협력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웠소. 아, 슬프구려! 세상은 모두 이익을 얻고자 서로를 대하고 있소.
- 홍대용 <의산문답> 中

 

21세기를 위한 18세기 고전 텍스트
홍대용의 진수를 모은 선집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차례

1부 진정한 선비

1. 자신을 경계하라

2. 진정한 선비

3. 독서의 방법

4. 스승 김원행

5. 혼천의를 만든 나경적 선생

6. 약관 연익성

2부 왕세손과의 대화

3부 '나'와 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성찰

 

7.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보자

8. 오랑캐에 대하여

9. 일본도 성인의 나라다

10. 우리나라의 노래

11. 금강산이 아니라 바다를 보라

4부 실학의 모색

12. 쓸데없는 연구, 쓸데없는 저술들

13. 숲 아래서의 경륜

14. 천문 기구 혼천의

5부 중국 벗들과의 교류

15. 기이한 만남

16. 선비의 사귐에 대하여

17. 독서

18. 10년 만에 도착한 편지

19. 양명학의 의의

20. 모든 사상은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제한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21. 이단의 학문에 대하여

22. 중국의 세 벗

6부 중국 견문기

23. 서양과의 만남

24. 관상대

25. 북경의 유리창

26. 중국의 시장

27. 중국의 기계 제도

7부 허자,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다

28. 의무려산으로 간 허자

29. 사람과 만물은 평등하다

30. 우주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

31. 자연과 문명

32.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


저자 소개

작가 홍대용

1731~1783. 호는 담헌이다. 18세기 조선의 북학파를 선도한 실학자. 천문을 비롯한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해 천문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했다.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과학에 서양에서 유입된 새로운 과학적 성과를 결합하여 지구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우주와 지구, 자연과 인간, 민족 간의 평등과 평화를 포괄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완성했다. 국가 경영에 대한 구상과 신분 문제에 대한 개혁적인 주장을 전개하기도 했다.

편역 김아리

한국외대 한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으로 '노가재연행일기 연구'가 있다. 현재 일반인과 청소년에게 우리 고전과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중 한 명인 홍대용의 '담헌서'를 요약한 책이다. 이 책의 역자는 이 책을 만든 목적을 홍대용의 사상이나 학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주길 바래서였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고전과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역자가 굳이 홍대용의 글로 책을 만들었다는 건 나름대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만큼 홍대용이 역자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단히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우리는 먼저 홍대용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홍대용이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 후기 그러니까 1700년대에 활동했던 학자로 많은 학문 중에서도 실학, 그러니까 실학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허와 실에서 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인데, 학문적인 뜻풀이로 자유로운 비판정신으로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학문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학문을 연구한 학자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실이다. 실이란 실제 적용가능한 것. 무가 아니라 유.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며 실제 현생에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학이 조선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다는 건 역사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조선시대 후기에 이러한 실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 발달했던 것일까?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그런데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유교적 통치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싸한 입바른 말과 탁상공론이 판을 치던 유교국가는 실제 임진왜란에서 거의 한 것이 없었는데, 이순신을 비롯한 몇몇의 충무공신과 지역 곳곳에서 침략에 대항했던 농민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이마저도 없었다면 진즉이 이놈의 유교국가는 패망하고도 남았다. 병자호란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조선은 두드려 맞기만 했지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한 국가의 왕이 타국의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했다. 국가가 전멸할 수준의 전쟁을 몇 차례 겪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써, 유교 문화와 유교적 통치로써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에서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갖고 있던 유교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 같은 것으로 실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일련의 사상 및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고 홍대용은 이것을 연구했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잘 알려진 실학자를 살펴보면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추사 김정희, 북학의를 집필한 박제가, 정약용 등이 있는데 홍대용은 당대 뒤를 이은 실학자들(박지원, 박제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 있다.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홍대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홍대용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1731년 5월 12일 충청도 청주목. 그러니까 오늘날 천안시에서 아버지 홍력과 김 씨 어머니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세가 되던 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석실서원으로 들어가 학문을 이어갔다. 석실서원은 엄격한 규율을 갖춘 배움터로 다른 곳과 달리 이곳만의 특별한 학문적 방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스승이자 서원의 원장인 미호 김원행 덕이었다. 김원행은 세속적이고 공허한 학문이 아닌 실용적 학문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홍대용이 과거시험공부나 실효 없는 이론만을 떠들어대는 학문이 아닌, 깊이 있고 쓸모 있는 실학적 학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 셈이다. 그는 학문 중에서도 특히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는데, 이것은 그가 당시 청나라인 중국을 방문한 내용을 쓴 글 '을병연행록'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홍대용은 자신의 숙부 홍억이 중국 사행의 서장관이 되자 그의 수행원 자격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34세인 1765년 11월에 한양을 떠나 1766년 4월 말에 한양으로 돌아온 약 6개월 간의 긴 여정이었다. 홍대용에게는 중국 여행이 대단히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1700년대의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된 지 100년이 넘었는데, 특히 그가 여행을 하던 시기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강희제가 통치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청나라는 주변 민족을 아우르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안정된 시기였다. 이때 청나라의 경제와 문화, 교육 수준 같은 것들도 역시 최고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때 조선 내부에서는 여전히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등의 명분론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또한 오랑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명나라 즉 청나라보다 한족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이 진정한 중국(中國)이라는 식의 소중화(小中)적 인식을 갖고는 청나라를 멸시했다. 이러한 현실을 홍대용은 일찍이 깨달았다. 석실서원에서 많은 것을 배운 홍대용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명분이나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에 맞는 실질적인 방안을 갖추는 것이 더 급선무라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홍대용은 중국여행을 통해 본인이 평소에 추구하던 사상과 학문을 더욱 발전시키고, 기존의 편견들을 깨부수고자 했다.

 

홍대용은 중국여행에서 기대했던 일 중 하나가 청나라의 천문 시설을 관람하는 일이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나라는 서양의 선교사 등을 적극 받아들이는 등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적극 수용했고, 그들에게 관련된 관직을 주기도 했다. 이에 홍대용은 여행을 하면서 서양 선교사이자 과학자들과 만나 담화를 나누고 그곳에 있던 여러 가지 과학, 천문기구를 구경했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청나라의 관상대(천문대)에는 문 앞을 기웃거리다 우연한 계기로 잠시 출입이 허용되어 기기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홍대용은 당시의 상황을 갈무리하며 그들의 기술력과 정밀함에 감탄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이 동행했던 통역사의 능력 부재로 인해 그들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던 것에 크게 아쉬워했다. 하지만 홍대용은 중국 여행을 통해 그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선입견을 타파하고 더욱 객관적이고 범우주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앞에서 알 수 있듯, 홍대용은 특히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과학을 향한 관심은 석실서원의 영향이 물론 컸지만, 무엇보다 그의 집안 분위기에 특별한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에는 천문과 지리 및 기후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벼슬인 관상감을 한 인척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천문학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과학자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를 제작하게 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혼천의는 당시 서양의 기술로 제작되어 청나라에 보관 중인 것을 중국 여행을 통해 눈으로 보고 온 뒤, 그가 몇 년간의 연구 끝에 조선 식으로 제작된 새로운 천문기구였다. 완성된 혼천의는 고향인 수촌(오늘날 천안) 집에 설치해 두었는데 현재는 혼천의의 일부만 전해져 온다. 그런데 저자는 홍대용이 혼천의를 제작한 것을 두고 재미난 평가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혼천의는 홍대용에게 과학적 성과물이지만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기기였을 것이다.' 저자는 아마 홍대용은 혼천의를 통해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를 조망하고 지구라는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역사와 인류 문명의 전재에 대해 사색하며 그의 사상이 무르익어갔을 것이라며, 홍대용의 혼천의 제작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홍대용은 당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적으로도 없었을 지구지전설을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지구지전설이란 땅은 둥글며 스스로 회전하고 있다는 근세 동양의 우주관이자 세계관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유래 없는 '파천황'의 주장이라고 표현했는데, '파천황'이란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은 것을 깬다는 뜻으로 그전까지 사람이 하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해냈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만큼 홍대용의 주장이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주장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의 글에서는 우주적 관점에서 인류를 이해하는 문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유교문화와 신분제도를 갖고 있던 조선사람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를 종합하여 볼 때 일치하지는 않지만 꽤 비슷한 경험을 했던 한 인물이 떠오른다. 17세기 이탈리아 종교재판소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엄연히 따지자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했던 갈릴레이와 '지구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둘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 첫 번째는 두 인물이 증명하고 주장했던 이론이 그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야기했듯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으로 주장했고, 홍대용의 지구지전설은 김석문이라는 당대 과학자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두 번째는 두 인물 모두 당 시대에는 전혀 대접받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이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추후 후대의 역사에 의해 두 인물이 주장했던 것들에 대한 가치가 재평가되었다는 것 역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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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유교관에 찌든 학자무리에 대항하고 우주론적 사고를 주장한, 한마디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다. 특히 책의 몇몇 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국민성에 대한 지적은 그 행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통찰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학자로서의 여러 행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국민들을 폄훼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사실에 기반해서 썼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망령되게도 금강산을 신선이 사는 봉래산이라고 부르면서 쌀을 바치고 절을 하는 미친 짓을 한다.

 

이것은 당시 금강산이 세계 최고의 명산이라고 불리던 조선 내부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는 발언이었다. 홍대용은 이를 두고 더 큰 세상을 알게 된다면 금강산은 그저 한 지역의 명산이라는 뜻으로 한반도 내에서가 아닌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이고도 실제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서 양반은 아무리 굶주려도 팔짱 끼고 죽치고 앉아만 있을 뿐 농사일을 하지 않는다. 간혹 성실하게 일하고 부지런히 실업에 종사하여 몸소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나무라고 비웃으며 무시한다. 그래서 자연히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일하는 자는 줄어든다. 이러니 재정이 궁핍해지고, 백성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유교기반의 성리학을 두둔하던 조정의 무리들을 비롯한 통치체계를 강력하게 비판한 말이다. 그가 명분보다는 실리를. 허황된 가치보다는 실질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잘 드러난 글이다. 지금같이 생각한다면, 현 정권을 대놓고 까내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오늘날과 달리 죽음이 휑휑하던 조선시대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조선왕실 차원에서 그를 위험인물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책을 읽고 난 뒤 그가 묘사한 조선시대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 교차되는 느낌을 느꼈다면 지극히 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도 여러 방면에서 인식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는 후진국 못지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대부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르신들과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젊은 세대가 뒤섞이면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된 것은 특히나 변화에 대한 수용 속도가 다른 두 영역이 부딪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숫자로 매겨지는 가치인 돈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경제와 달리 문화와 풍습은 수치화가 되기 어렵고 어려서부터 몸에 배며 성장하는 것들이기에 이들의 변화에 대한 수용 속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빠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동안 여러 문화와 인식 또한 변했지만, 그것은 그것들이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러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가 바로 미국의 블로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크 맨슨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뒤에 느낀 점을 풀어가며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꼽은 일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급성장기를 지나며 기존의 유교관의 부정적인 면들과 민주적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들만 대부분 흡수했다고 설명한다. 장점 한 가지를 수용해도 모자랄 판에 단점을 모조리 수용했다는 건 비록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의 분석은 분명 우리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답답한 시스템을 두고 일각에서는 우리나라를 흥선대원군 보유국이라며 조롱한다.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들인 국민들이 말이다. 실제로 나는 최근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샘알트먼이 만든 월드코인을 조사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영향력이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단체에서 타국에서 만들고 전 세계적인 수요를 가지고 있는 코인을 조사한다고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한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조사를 하고 어떻게 조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데이터를 요구한다고 해도 받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들의 지갑을 일일이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마도 그가 작성한 백서 정도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할 텐데 그 마저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실효가 없는 것이며, 의미 없는 명분에 초점을 둔 행동이라고 한다. 홍대용이 기피했던 그 자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자국의 기술력에는 미친 듯이 열광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을 지배하는 기술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같은 행동은 갈릴레이를 자택구금했던 종교재판소의 태도나 별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은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코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빈부격차 심화와 출산율 저하가 그 최전선에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선진국들의 추세이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더욱 심각한 건 사실이다. 난세의 영웅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이 난국을 타개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거나 혹은 분열된 사회를 잘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냉철한 사리판단과 과감한 결단력이면 족하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 사회에 뿌리내린 편협하고 교만한 문화를 깨부수고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하고 갖은 핍박과 결국엔 가택구금을 당한 갈릴레이와 우주론적 사고와 실학적인 면모로 당대의 주류 학계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행보로 주변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던 홍대용이 현대에 들어와 재평가되었듯, 사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참 많은 생각이 드는 책이다. 홍대용의 저작집 '담헌서'를 요약한 책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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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 홍대용 - 교보문고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작품 선집권위주의적이고 고지식한 고전의 이미지를 탈피해 부담감 없이 쉽게 읽을 수 있게 구성된 『우리고전 100선』제4권 우주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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