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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by 세자책봉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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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은 이제 가장 광범하고도 비당파적인 의미에서 정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독서가 되었으며, 다양한 구체적 상황이나 특정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1944년 처음 발간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당시보다 현재의 미국에 더 잘 적용될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노예의 길>

2023. 04. 29. 술을 마시지 않은지 세 달이 넘어간다. 몸도 좋아지고, 정신도 좋아졌다. 그 동안 나는 왜 술을 마셨을까?


차례

제1장. 버려진 길
제2장. 위대한 유토피아
제3장.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제4장. 계획의 불가피성
제5장. 계획과 민주주의
제6장. 계획과 법의 지배
제7장. 경제적 통제와 전체주의
제8장. 누가, 누구를?
제9장. 보장과 자유제
10장. 왜 가장 사악한 자들이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되는가?
제11장. 진리의 종말
제12장. 나치즘의 사회주의적 뿌리
제13장. 우리 속에 잠재된 전체주의
제14장.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적들
제15장. 국제질서의 전망


 저자 소개


지은이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

189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출생의 영국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 그는 1921년과 1923년 법학과 경제학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원으로 자유주의 이념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사회주의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판하였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사상은 1980년대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볼셰비키 혁명을 겪으며 사회주의에 빠져들게 되었고, 20대 초반까지는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빈 대학교에서 오스트리아 정부의 경제 고문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만나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 후 1931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50년에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 말년에는 서독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종신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예의 길>,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자유헌정론>, <치명적 자만>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 특히 정치와 사회 분야의 문제들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미국이나 영국, 일본처럼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적이 있다거나 민주주의 국가로써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있는 국가들은 반드시 겪은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책을 포함한 여러 자료를 찾다 보면 대부분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은 민주주의의 시발점인 1688년 명예혁명으로부터 무려 300년이나 지났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지 250년이 다되어가는 것과 비교해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긴 시간 동안이나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세계대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책 <노예의 길>이 1940년경 최초 출판되었음에도 현재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에 제법 잘 들어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경제 분야에 싱크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몇몇 사회적 현상에 우려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논의는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세력들이 볼까 두려워 평가는 하지 않으며, 단순 우려에 그칠 것이다. 그들은 그들과 관계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찾아내는 습성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우려는 매년 증가하는 복지 예산과 그 효용성에 대한 것이다. 정말 복지는 무조건 많을수록 좋은 것일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시행 중인 여러 복지제도 중 취업장려금과 지역화폐에 대해서는 특히나 우려스럽다. 사람들이 일을 할 곳이 없는 건 둘 중 하나의 문제다. 국가에서 산업 개편과 일자리 창출에 대한 제어를 잘하지 못했거나 또는 개인들이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전자의 경우라면 국가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줘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광산업이 망해가며 광부들이 줄어들 때, 새로이 등장하는 신기술이 산업에 연착륙하여 새로운 일자리가 형성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건 국가의 몫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이것들의 역학관계가 한 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취업을 하라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현금을 지원한다는 건 그들을 사탕으로 유혹할 수 있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세 살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취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취업을 이미 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양측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제도다. 오죽하면 취업을 하지 않고도 복지금으로만 먹고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이런 복지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복지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 일자리는 많다.
 
지역경제를 되살리자는 의미에서 시행하는 지역화폐제도는 겉으로는 대단히 좋은 복지제도처럼 보인다. 실제로 만 원짜리 상품권을 10% 할인된 가격인 구천 원에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상품 가격의 절대적인 할인이 아니라 물가상승에 기여한다는 데에 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경제논리에 한 가지가 추가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화폐의 가치일 것이다. 화폐의 가치에 따라 판매자들은 가격을 오르고 내리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판매자들은 이제 만원을 기준금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10% 할인 가격인 구천 원을 기준금액으로 떨어진 화폐 가치만큼 가격을 올리게 되므로 결국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비싼 가격으로 소비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판매자들이 가격을 올린 게 문제가 아니라,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 게 문제다. 인위적으로 국가에서 떨어뜨린 화폐 가치 덕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상품가격의 10%를 이미 세금으로 지불하면서도 더 비싼 가격으로 상품을 구매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지역화폐 금액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올리기 쉬운 금액도 내려울 땐 어려운 법이다.
 
두 번째 우려는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진다는 뜻은 그만큼 개인의 자유가 줄어들고 있으며 국가의 개입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사람의 뼈 역할을 하던 국가가 이제는 몸속 하나하나 장기의 모세혈관이 되려는 듯 국가는 더욱 깊은 곳까지 사회적 개입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 한 가지 일을 하려면 부수적으로 알아야 하거나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매해가 지나갈수록 각종 법과 규제가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비해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많은 규제 속에 갇혀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자가 아닌 특권층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더욱더 많은 규제와 제도에 갇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사회를 위한 일이건 지구를 일이건 관계없이, 인간들은 점점 자유를 빼앗기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가이드라인의 뜻은 이미 변질된 지 오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이제 가이드라인은 해당 기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고 있다. 본말전도의 형국이다.
 
세 번째 우려는 국민들이 중앙집중형 권력의 필요성을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근래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으면 서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과 이태원 참사다. 그간의 행적들로 미루어 짐작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는 얼마 전까지 국가의 통제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며, 국가의 통제가 더욱 강해야 한다는 식의 여론을 마주한 적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꽤나 정부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으로 판명됐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최저 수준의 사망률과 감염률을 보며 중앙집중형 권력의 효용성을 몸소 체감했다.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는 중앙집중형 권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경찰이 행사에 더욱 많은 인원을 배치하는 등 국가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더라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에서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을 비롯 여러 유럽국가의 시민들이 정부의 통제에 시위하며 극렬히 저항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이 과연 코로나19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르고, 백신 자체가 시민들을 조종하려 한다는 미친 음모론에 사로잡혀 국가를 상대로 시위를 했던 것일까?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는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것이 아주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된 범죄적 행위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또 다른 유태인을 학살하는데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라는 비실존적 단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는 경계하는 편이 낫다.

저는 그저 평범한 독일 공무원일 뿐입니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 나치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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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기꺼이 주말을 반납하여 서울역과 광화문 거리에서 시위하는 모습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라온 시절의 자유와 지금 시대의 자유란 참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있었던 백종원과 예산 국밥거리 상인들의 의견대립 내용을 자세히 보면 어르신들이 추구하는 자유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어르신들은 백종원의 조리, 위생 개선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요구가 부담스럽다며 백종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자유'다. 어르신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장사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 잘 모르고 배우기 싫어하고의 인성이나 지능,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만인의 장사솔루션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백종원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가 빚어낸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연금개혁안에 격렬히 저항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 역시 단 한 가지다. '자유'다. 법정 퇴직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늘린, 누군가는 불과 2년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적게 늘린 개혁안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2년의 자유를 빼앗길 것에 크게 분노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르신들도 단순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가 추구하는 대로 자유롭게 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자유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결국 백종원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각자의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타협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서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걸 알기에 백종원도 상인들을 더 이상 회유할 것 없이 그게 그렇게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자유를 원하면서 실상 자유를 무시하는 태도가 사회에 만연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걸 하려면 반드시 ~을 해야 해"와 같은,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반드시 하나의 정답만을 추구하는 교과서 사고방식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자유가 있기에 가능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자유를 망각한 채 오히려 그것을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는 식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지나친 자유가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현재 자유를 위한 삶의 투쟁에서 평등을 위한 삶의 투쟁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평등을 삶의 투쟁으로 여기는 것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다. 인간 모두가 하향 평준화 되는 그런 평등 말고. 인간 모두가 절대적인 권력이 만들어 낸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그런 평등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인의 부를 빼앗아 오려는 요행에 가까운 그런 평등 말고. 
 
부모님 세대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이념대립과 세대갈등으로 얼룩진 현재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상황에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단순 몇 줄로 요약할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다. 책 <노예의 길>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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