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히려 그는 끝까지 손에 쥐고 있던 한 줄기 희망을 놓은 것에 더 가까울지도, 존 맥스웰 쿳시 <추락>

by 세자책봉 2023. 3. 30.
728x90
쿳시는 '추락' 등 주요 작품을 통해 현실 밖에 선 사람이 놀랍게 현실에 관여하게 되는 양상을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해 왔다. 쿳시의 작품은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화법으로 잔인한 인종주의와 서구 문명의 위선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진지하게 의심해 왔다.
(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 선정이유)

쿳시의 문장들은 똘똘 말린 스프링과 같다.

그것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감당하려면 다른 작가들은 몇 페이지를 할애해야 할 것이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 - 뉴욕타임스

"심오하고 풍요롭고 놀라운, 고전이 될 소설" - 뉴욕 포스트

<추락>

2023. 03. 31. 벚꽃이 이번 주 만개합니다. 무궁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건 이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일까요?


차례

1부 ~ 24부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지은이 존 맥스웰 쿳시(John Maxwell Coetzee)

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태생의 작가,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현대 영어권 문학에서 최고의 비평적 찬사를 받는 작가 중 한 사람. 케이프타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가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 문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주립대 버팔로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이때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이후 2002년까지 모교인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후 호주로 이민을 떠나 2006년 호주 국적을 취득했다. 첫 장편 <어둠의 땅>(1974)을 발표한 이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1983)와 <치욕>(1999)으로 부커상을 두 번이나 받았고,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등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망을 쌓았다. <치욕>은 한국 쿳시 연구의 권위자인 전북대 영문학과 왕은철 교수의 뜻에 따라 <추락>으로 발간되었다. 주요 대표작으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 <포>(1986), <철의 시대>(1990) 등이 있으며, 최근작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22)가 있다.


문제는 문제가 되었을 때 문제가 된다. 반백 년을 살아온 남자와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의 사랑은 문제가 되었다. 나이 차이가 문제였을까? 내가 알기론 사랑에 나이 제한은 없는데. 그들은 자신과 같은 영장류인 그의 원초적 본능을 문제 삼는다. 그런데 그를 향한 심판에 주요 의제가 결코 본능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트리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건의 초점을 본능이 아닌 사회적 지위에 둔다. 그들은 그에게 스무 살 여자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것이냐고 묻는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보다는 평소에 그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감정적 요인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애써 그렇다고 답한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건 안 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다. 그들은 그에게 대답이 성의 없다며 몰아붙이지만 그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굳이 들어줄 이유가 없다. 어차피 그들은 그의 진실을 들어줄 용의가 없으니까. 인간은 절대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실은 오로지 그와 스무 살 여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모순적인 인간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어떤 사죄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삶을 향한 그의 의지에 누구보다 충실했을 뿐이니까. 나치의 만행에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동참한 평범한 공무원들처럼. 악의 평범성. 하지만 그의 의지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에 의해 문제가 되었고, 사회는 사회의 방식대로 문제를 처리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의 말은 결코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개가 짖는다. 그도 짖는다. 결국 그는 그들에게서 격리당한다. 우리 안에 갇힌 개들처럼. 

 

그는 애써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땅을 넘겨주면서라도 삶의 안전을 얻어내고자 한다. 이제 그는 타인이 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던 학과 교수들처럼. 이번엔 그가 그녀를 재판한다. 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재판장에 앉게 된 그녀는 그가 탐탁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그녀는 그의 딸이 맞다.


그를 처음 볼 때부터 턱을 땅에 대고 누워 그에게 별 관심 없는 듯 누워있던 한 마리 개가 있다. 인간에게 버림받아 마음의 상처를 가진 녀석이다. 그런데 그 개는 자신을 거두어들인 딸도 아닌, 자신들을 관리하는 페트루스도 아닌, 그를 따른다.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 역시 주변의 상황이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리고 버림받았으니까. 자신의 전 부인으로부터, 그리고 스무 살의 그녀로부터, 그리고 직장으로부터.

 

그는 딸의 친구인 베브 쇼와 아픈 동물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동물병원이지만 지원이 끊긴 탓에 이렇다 할 시설도 없고, 필요한 약도 없다. 열악한 환경이다. 말이 돌보는 일이지 실상 동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줄여주는 것 밖에는 없다. 안락사.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견디는 가느다란 생명선을 자르는 일. 현실 도피를 위한 죽음. 죽음을 위한 죽음. 과연 동물들의 죽음은 그들의 의지일까, 혈액 속으로 마취제를 넣는 인간의 의지일까?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기적이고 우월성 짙은 인간의 가혹한 처벌은 한 줄기 빛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죽음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동물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개들은 후각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조차도. 그런데 개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사를 놓는 인간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핥는다. 그는 혼란스럽다. 

 

죽음을 앞에 둔 개들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이까짓 내가 뭐라고 딸의 현실을 그리고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그가 생각하는 질서와 정의, 사회적 제도와 규율 따위는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이제 그를 놓아줄 준비가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을 하늘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개를 죽인다. 한 마리. 두 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개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다. 이번 주에도. 다음 주에도. 그는 개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다. 그는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다.


결국 그는 그의 방식대로 판결을 내린다. 그녀는 별 생각이 없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농장에서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도 그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는 단념한다. 자신의 삶을, 그녀의 삶을, 죽음을 앞에 둔 처연한 모습의 강아지들처럼.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드디어 그는 세상과 타협을 한 셈이다. 대타협이다. 그가 자신의 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일 뿐이다. 받아들인다. 자신의 딸과, 전 부인도. 그리고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스무 살의 그녀도. 그는 진정한 타인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맞서지 않는다. 아니, 맞서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는 추락했다. 치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자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의 속은 그의 속이 아니다. 이른바 요즘말로 '현자타임', '현타'. 약한 충격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강한 충격은 오히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현실에서 강한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당한 일이나, 그의 딸이 당한 일은 아주 치욕적이다. 치욕은 물론이고, 뻔뻔한 가해자들을 다 죽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녀는 생기를 잃어버렸고, 그녀의 집 앞에 묶여있던 개들은 죽어버렸으니까.

 

추락이라는 단어는 스무 살 그녀의 아버지가 처음 했던 말이다. 이때까지 그는 자신이 추락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없는 방랑자였다. 하지만, 시골의 농장에 살고 있는 그녀의 딸이 침입자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모습에 서서히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체념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추락'이고 치욕일까? 어쩌면 그는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실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것 같기도 하다. 비로소 그는 그녀를 이해한 것 같지만 사실 죽을 때까지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손에 쥐고 있던 한 줄기 희망을 놓은 것에 더 가까울지도.


나는 보통 책을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책을 읽고 리뷰를 작성할 때 타인이 작성한 내용과 접촉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들이 작성한 글에 영향을 받아 나의 표현력이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서점에 들러 책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고,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 주위에서 하는 평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는 이번 책 '추락' 리뷰를 다 작성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남긴 리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추락'은 노벨문학상이라는 성역에 들어선 책이라서 그랬을까? 모든 리뷰에서 남아공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는 리뷰가 없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책 '추락'은 남아공의 백인과 흑인정권의 교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뜻있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좌절했다. 그것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백과 흑, 흑과 백이라는 대비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남아공의 역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남아공의 역사를 잘 몰랐던 것도 있고, 배경지식보다는 책에 쓰인 내용에만 집중했던 탓이 크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정말 그 역사적 사실을 책을 읽고 알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책을 읽기 전에 또는 읽은 후에 배경지식을 찾아 알게 된 것일까? 물론, 양쪽 모두 훌륭한 리뷰가 될 수 있음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쓰인 리뷰들을 보며 나는 이런 식의 리뷰가 지적 허영심의 경계선 어딘가에 있지는 않은가에 대해 문득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반드시 그것을 알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니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될 듯하다. 동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는 책의 내용이 곧바로 시대적 배경으로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시절로부터 20년이 지나지 않았던가.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이 책은 연출과 구성만으로도 가히 압도적인 소설임이 틀림없다. 너무나도 훌륭한 책이다. 책 '추락'을 적극 추천한다.

 

 

▷ 사진 참조

 

▶ 세자책봉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ucceeding_story/
▶ 세자책봉 브런치 : https://brunch.co.kr/@tpwkcorqhd
▶ 세자책봉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tpwkcorqhd

반응형

댓글